| 슬라보예 지젝 강연회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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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이 한국에 왔다. 슬라보예 지젝.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6월 27일(수) 저녁 7시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지젝의 강연이 열렸다.
그는 또한 소위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데 소위 도식적인 공산화과정만을 바라보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관념적인 좌파를 예로 들면서 끊임없이 창조적인 고민을 통해 자본주의 근본의 변혁을 위한 생산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산주의는 문제의 이름이라고 표현하면서 현재 글로벌 자본주의로 인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우리의 몫이라며 문제해결을 넘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창조적 지식을 키워야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이다.
이러한 역설을 발전시켜 다른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코미디인데 젊은 여자가 남자친구와 저녁식사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파트에 들어와 커피 한 잔 하지 그래?” 남자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 그러나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문제될 것 없어 우리 집에는 커피가 없어.”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중부정만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커피 안 마셔” “우리 집에 커피 없어” 이것 이상의 에로틱한 초청이 있을까요? 직접적으로 우리가 예상한 바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커피는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농담으로 시간을 낭비할까요? 왜냐하면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직설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는 거짓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커피의 예가 적절합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말하지만 결국 크림 없는 커피를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축적 의미에 주목해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럽에서는 심장질환이 한국보다 많이 발생하는데 그 원인은 금융위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이 긴축조치를 더 많이 강요하면서 임금을 낮추고 보건서비스를 축소합니다. 우유 없는 커피를 마셔야한다고 지도층이 강요 한다 칩시다. 사실상은 크림 없는 커피를 마시라는 것이죠.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함축적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이것이 저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Totality)이라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총체성 등등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실재 변증법적 분석을 해보면 핵심은 특정 이벤트를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특정 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언급할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야하고 국내외적으로 살펴야합니다.
사람들은 애플사의 성공을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폭스콘 없는 애플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입니다만 중국 폭스콘 공장의 높은 사람이 타이페이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는 “백만 마리의 동물을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동물’은 폭스콘에서 일하는 자신들의 노동자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콩고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콩고공화국은 많은 자연자본과 광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아무런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국지적으로 전투가 일어나고 있고 광물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콩고를 자본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글로벌 자본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법치가 부재한 국가도 포함시켜야합니다. 콩고에는 아동전사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콩고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성공한 국가들만 포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중국이나 싱가폴, 북부유럽 뿐만 아니라 콩고와 같은 암흑의 세계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성장을 잘 하고 있지만 몇 년 전 한국의 대기업중 하나가 마다가스카르에 비옥한 토지를 사려고 했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 개발된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를 사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새로운 기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요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체제들의 실패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개념의 부산물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그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들과 대립과 끔찍한 파생물들도 역시나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카테고리가 있다면 실업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맑스를 통해 봤을 때 착취와도 연결된 것입니다. 오늘날 실업자들은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용이 가능하지 않는 사람들 영구적인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말리아, 콩고처럼 나라 전체가 실업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특정지역전체가 실업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업무와 시장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것이죠. 이미 애초에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이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수백만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교육을 받은 전공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도 실직자에 포함시켜야합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점차 실직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할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반(Anti)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미디어를 보십시오. 특정기업이 아동을 착취하고 다른 기업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특정은행은 투기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렇게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 많은 자본과 은행에 대한 보도가 끊임없이 나오지만 사람들을 탓할 수 는 없습니다. ‘자본가는 탐욕스럽다.’라는 해석에 저는 이제 실증이 납니다. 최근에 자본주의는 탐욕이라는 것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의적으로 반자본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를 탓하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 분석은 시스템자체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가들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체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만을 고민합니다. 제가 어릴 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글로벌 자본주의를 추구하게 됐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권리와 자유를 주창하게 됐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른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본주의체제가 아닌 체제는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제 친구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공상과학소설에서 우리는 손쉽게 세계종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친구가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도 또 다른 대안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일까요? 20세기 공산주의가 끔찍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체제를 고수하자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 책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전공학의 문제로 인해 생태학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문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좌파성향의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한다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의 예로 급속한 발전을 환경이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이 이러한 급속한 발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을 지역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선활동, 유기농식품에 대한 호감도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다소 시니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방세계에서는 유기농식품이 인기가 많습니다. 유기농사과를 유기농상점에서 구입을 합니다. 보통사과보다 볼품이 없는데 여러분은 더 비싼 돈을 주고 그 사과를 구입을 합니다. 정말로 그 상품이 환경을 위해 좋은 일을 했는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여러분이 그 사과를 삼으로써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환경파괴는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렴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유기농 사과를 구입을 했으니 나는 지구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선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에이전트가 여러분을 아프리카 아동과 결연을 맺어주고 여러분은 매달 20달러의 기부금을 냅니다. 1년 후에 그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받습니다. 이런 활동은 여러분을 매우 기분 좋게 합니다. 내가 돕는 아이의 얼굴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간편한 출구와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생활의 방식을 크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적인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오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실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현상을 발견했는데 13층이 없더군요. 정말로 13이라는 숫자가 두렵다면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누구를 속이려는 것입니까. 14층이 사실은 13층이라는 것을 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듯이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외곽에 어떤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철학자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출입구에 어떤 악령을 쫓아내기 위한 부적이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왜 이런 미신을 걸어 놓았느냐는 질문에 “물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두는 이유는 믿지는 않아도 효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내가 믿지 않더라도 작동은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본주의)시스템을 보면 우리 매일 매일의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와 같은 미신이 존재합니다.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신념의 표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이 세계문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프렌즈’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입니다. 웃어야하는 순간에 웃음소리가 납니다. 한국도 비슷할 것입니다. 퇴근 후 피로한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켜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 대신에 웃음을 웃어줍니다. 나 같은 경우 마치 내가 웃은 듯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애국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우리나라를 놀리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나는 ‘우리 아들 때문이다.’ 이런 식의 핑계를 댈 것입니다. 유럽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서도 선물을 삽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산타클로스를 믿느냐고 물으면 “저도 바보가 아녜요.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믿는 척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결고리고 작동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구결과이기도 한데요. 화장지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문을 믿는 몇몇의 사람들이 화장지를 사재기 하게 되면서 정말로 화장지의 공급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화장지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런 소문 때문에 실재로 화장지 공급부족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종의 독설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수론자들은 “우리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도입했다. 사람들은 희생을 모른다.”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인칭으로서는 믿지 않지만 우리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했을 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념이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과학자들이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원시사회를 발견하게 돼 그들과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 원시부족은 “우리의 토템이 독수리다.”라는 식으로 설명했더니 과학자들은 ‘새를 가지고 징표를 삼다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럽인이 이 부족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정말로 인류의 근원이 조류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진짜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삼촌이 그런 말을 했어요.”라는 식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누구든지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인류학자와 탐험단이 기니아에 있는 부족에 방문했습니다. 그 부족은 ‘죽음의 춤’을 추는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부족을 만나 춤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그 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인류학자는 만족스러워하며 원시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 춤은 죽음에 대한 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또 다른 탐험단이 그 부족을 만나 예전에 만났던 인류학자와의 만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두 번째 탐험단은 그 부족의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갔기 때문에 좀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그 부족은 첫 번째 탐험단은 자신들에게 뭔가를 요구를 했고 우리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탐험단이 부족으로부터 죽음의 춤을 보여주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해서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춤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탐험단이 죽음의 춤을 원했기 때문에 그 부족은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합니다. 퍼스트 러너라는 에스키모에 대한 환상을 담은영화가 있습니다. 두 개의 에스키모 부족이 서로를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에스키모 출신의 한 저자가 그 신화를 바꿔서 결론을 두 부족이 서로 화해를 하는 내용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저자에게 왜 그 신화를 상업화하는 내용으로 바꿨느냐고 물었더니 답은 “그렇지 않다. 내가 쓴 책은 우리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바로 유럽인들이 고유성에 집착을 하고 오리지날에 집착하는 것이지 이렇게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의 약, 고유의 약을 파는 상점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뉴질랜드에는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뉴욕에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바꾼다고 합니다. 여기서 역설은 본래의, 고유의 전통의 진품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구조, 신념의 구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것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념과 연관된 것으로서 주식시장에서의 선물거래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입니다. 투자를 할 때 짐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2년 후에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까지도 미리 점쳐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와 연과된 것인데 객관적인 현실은 없고 우리가 믿는 것만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구체화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맑스의 상품화의 페티시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맑스의 마켓 페티시즘을 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신념을 행동에 옮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맑스는 굉장히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시장 안에서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변증법적으로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불교와 같은 신념이 아시아에서도 심지어 은행가, 자본가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성향이 동양적 불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의 취약성을 이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지향을 가지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여러 가지 신념이 충돌해서 붕괴할 수 도 있습니다. 취약성과 외관의 취약성 등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존재론이 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고 이런 가르침이 모던 혹은 포스트 모던주의, 심지어 글로벌 자본주의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도 합니다. 작은 차원에서의 생태학과 하나의 생태학으로서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캔과 신문을 재활용 잘 했는가, 안했는가.’라는 물음은 결국 미신적인 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의 근본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서 지구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은 깨닫고 계십니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미신적인 행위에 대한 예 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스포츠경기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큰 소리로 팀을 응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그 팀이 힘을 얻을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선수들은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도 스타벅스가 있습니다.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어떠한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스타벅스는 사회적으로 의식 있는 회사라는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실 때마다 2센트씩 소말리아 아동에게 전달되고 열대우리 보존에 사용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를 하면 죄책감을 해소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이런 식의 현상과 신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시스템은 붕괴직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징후를 지난 2,3년간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스템이 거의 극한점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가 점령시위의 배경에도 이러한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월가 시위는 인종주의나 전쟁에 관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시위들은 사람들의 통찰력을 이용해서 어떤 구조적인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좌파로서 우리는 솔직해져야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이 전통적인 좌파라면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5년 전까지 서구권에서는 자본주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맑스주의자들, 지식인들은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위기가 일어나면 바로 붕괴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붕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심지어 대재앙을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서구유럽과 미국에서 그리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좌파는 어디 있습니까? 어떤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좌파는 사람들을 하나로 조직해서 이와 같은 운동을 이끌어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나는 좌파의 대안에 대해서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획은 일반적인 계획,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 말입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붕괴가 진정한 붕괴인가 아니면 제한적인 붕괴로서 더 많은 공공지출이 필요하고 보건 분야를 개혁해서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본주의를 벗어나서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기위해 무엇인 필요한가라는 계획들 말입니다. 지역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개혁 등 이러한 것에 대한 현실적인 제안에 대한 좌파의 대안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급진적 좌파는 여전히 내시향적 기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기다릴 뿐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진정한 노동자 계급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고 진정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급진적 좌파들은 이와 같은 사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현실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생태학적인 대재앙, 전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지구적인 대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의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불가능한 꿈을 꾸는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서구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사람들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하가를 이야기 할 때 미디어에서 이상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궁극적인 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하드웨어가 불멸의 존재가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의사가 이야기 한 것인데 성기를 두 개로 분리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지요. 다른 행성으로의 여행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개인의 영역에서는 기술을 이용해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불멸의 존재도 될수 있고 인공의 장기도 교체할수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세계가 열린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변화라는 것을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면 테러와 전쟁이 발발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적합한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공간의 구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라는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살살투쟁하자.’는 해결책에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비관론자입니다. 우리는 핵의 위기 혹은 생태적인 위기가 후쿠시마보다도 훨씬 더 큰 힘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대처하는 일들을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전공학을 생각해 봅시다. 굉장히 놀라운 영역입니다. 유토피아적인 미래가 아니고 오늘날에도 기술이 발전합니다. 유전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우리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르파는 CIA가 후원하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섬뜩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신념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유전공학으로 뇌의 구조를 바꿔 한 사람의 신념을 바꾸는 프로그램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신봉자가 테러리스트가 됐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이 그러한 신념을 신봉하기까지 뇌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관찰한 후에 이데올로기적인 세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뇌는 반복적으로 주입을 시키는 것인 반면 다르파는 화학적인 수술요법을 통해 뇌에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적인 분투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의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고 ‘너의 뇌로 들어가서 직접 바꿔버리겠다.’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늘날에는 여러분의 뇌의 명령을 해독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처럼 여러분의 생각을 컴퓨터와 연결하면 생각을 인지해서 명령을 받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두운 미래를 여러분에게 예고하고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정체성을 위협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생각을 갖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협을 하더라도 제 사고 영역은 제 것이고 저만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영역이 무너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엄청난 도전이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데올로기는 거짓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거짓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학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종교에서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관용을 지지합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관용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관용이 다른 의미를 띄기도 하는데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때 그렇습니다. 금연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콜과 마약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권에서 금연을 옹호하는 좌파들이 마약은 허용하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금연에 대한 강력한 문화는 어떻게 형성이 된 것일까요? 서구권에서는 담배를 구매할 때 담배갑에 건강에 대한 경고문이 있습니다. ‘담배는 여러분들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몸을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또 폐와 장기가 손상될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도 있습니다. 이 예시는 금욕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섹스도 즐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부일처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라 그러나 너무 푹빠지지는 말아라.’라는 이데올로기 같습니다. 007시리즈 중 ‘퀀텀오브 솔러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좀 좌파적입니다. 제임스 본드가 볼리비아의 정권을 어떤 기업으로부터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 영화중 유일하게 제임스본드와 본드걸 간의 정사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댄 브라운의 끔찍한 소설과 영화를 보셨습니까? 다비친 코드를 예로 들면 로버트 랜덤이라는 주인공과 예수님의 증손녀가 나오는데 이들 간에도 정사신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다는 얘기인데 이 책에서 즉 지구상에서 섹스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의 댄 브라운 소설과 영화를 보면 소설에서는 정사신이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베드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얽히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유럽에 보면 중매회사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중매결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영어권에서 ‘사랑에 빠지다’를 표현할 때 ‘퐁당 빠지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알렌 바디우와 저 역시 그것을 깨달았는데 점차적으로 중매회사들이 ’사랑에 퐁당 빠지다.‘라는 카피로 광고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고도 결혼에 성공하게 해주겠다.‘는 문구를 광고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과의 깊고 복잡한 관계를 하지 않고도 결혼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섹스라는 것은 더 이상 열정적인 다른 사람과의 교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불행하게 될 것 이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랑의 교감이라는 것이 이제는 진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자위행위와 같다는 인식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지하고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산업들이 많은 플라스틱 제품을 내놓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스팸메일을 통해 자위기구를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상대가 없어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개구리 왕자와 소녀가 뽀뽀를 해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녀가 개구리에게 뽀뽀를 하자 왕자가 돼버립니다. 왕자가 사람이 되고 나서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맥주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소녀를 만지자 소녀가 맥주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기술 발전과 함께 탈섹스 사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추행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추행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집착을 하다 보니 이성의 호감을 사려는 행동도 추행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추행에 대한 공격은 계약적인 섹스로 이어집니다. 미리 계획을 짜고 서로간의 합법적인 계획 하에 서로를 쾌락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나친 성적 헌신이라고 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고 신념의 구조라는 것도 자본주의와 관련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믿지 않더라도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소비와 생산, 교역 등 우리의 경제 핵심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해야 되고 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특정한 교착상태에 근접해 있고 과거의 전통에 의존해서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자본주의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결합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큼 구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진입하고 있고 종전의 방식으로는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즐겨 했습니다. ‘상황이 침울할지라도 터널 끝에는 항상 희망의 빛이 있다.’ 터널 끝에 빛이 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한다면 나는 ‘다가오는 빛은 또 다른 기차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시니컬한 유모이죠. 저 역시도 명확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이름입니다. 우리 지구의 문제, 유전공학의 문제, 지적재산권에 대한 문제 등에 직면해 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전문가는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지식인은 전문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를 하나의 법칙을 규명하고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대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큰 위기를 모면하는 시스템에 많은 도전을 가함으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창출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론 공부만 하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라는 논리는 조작입니다. 사고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 상황은 절박하겠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합니다.
출처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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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라는 것은 문제의 이름입니다."
토요일 아침의 가족회의
전혜성 여사의 가족은 대가족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시간을 정해 공동경험을 많이 쌓도록 했단다.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미국에서 동양의 집단적 자아, 공동체 의식을 경험하게 하여 대화를 통해 협력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땐 가족만의 행사로 토요일이면 함께 도서관을 찾고, 금요일 밤마다 같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가족의 밤을 보내고 주말 저녁이면 공부방에서 온 식구들이 함께 공부하고,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며 대화를 나누고 토요일 아침 식사 후에는 꼭 가족회의를 했다고 한다.
가족회의에서 리더는 가정에서의 위치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매주 한 명씩 차례대로 아이들은 토론을 이끌고 회의 주제를 준비하며 부부는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배우고 아이들은 민주주의 적 회의 진행 방식에 익숙해지며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 배우고 합의하며 협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회의가 교훈적이라고 하면 자칫 그 주제가 거창할 거라 오해하기 쉬운데 한가지 예를 들면 "매주 쓰레기를 밖에 내놓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인가", "밤에 문단속은 누가 할 것인가" 처럼 사소한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 문제를 놓고 아빠와 아이들이 논쟁을 벌이는데 아빠의 의견은 형제 자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쓰레기 문제와 문단속 문제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빠의 의견이 한국적인 사고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순번제로 하는게 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아빠와 아이들이 한참 동안 양보하지 않은 곳에서 전혜성 부인이 나서 아버지의 제안을 따라보자고 했단다.
"아버지는 가족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밤에 문은 꼭 잠가야 하고 또 쓰레기는 제때 버려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려는 것이지. 아버지는 개인 사정보다는 전체의 입장에서 일이 해결되는 것을 원하시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의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다시 말해, 너희는 '개인 정의'를 주장하고, 아버지는 가족 전체의 안위를 위한 '공동 정의'를 주장하시는 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의 정의에 관심 있지만 아버지는 정의가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시는 거야. 몇 년 있으면 큰아이가 먼저 대학 가서 집을 떠날 테니 당장은 불평등해 보여도 긴 시간을 두고는 어쨌든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갈 테니 말이야. 너희들이 주장하는 순번제와 결국 같은 셈이지? 너무 성급하게 지금 당장의 것만 보지 말고 길게 생각해 보렴. 아마 한국식이라며 싫어하는 방식도 결국 너희들의 주장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야. 서양에서는 시간을 직선의 개념으로 보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며 변화를 진보라고 보지.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는 시간이 순환한다고 믿는다. 환갑도 그렇고 사계절이 있어서 일정한 시간 안에서 빙빙돈다고 생각해. 고로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공평하게 될 거야."
아이들은 당장 마음에 안 들고 미심쩍더라도 일단 '한국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가족 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아가서 어떻게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여 조율하고 합의를 이끄어 내야 하는지 깨우쳐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족회의를 통한 교육의 잠재성은 실로 대단했으며 야단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지키려 했고, 집안 문제도 협조 받을 수 있기에 대화와 공동 경험의 힘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전한다.
출처 :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땐 가족만의 행사로 토요일이면 함께 도서관을 찾고, 금요일 밤마다 같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가족의 밤을 보내고 주말 저녁이면 공부방에서 온 식구들이 함께 공부하고,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며 대화를 나누고 토요일 아침 식사 후에는 꼭 가족회의를 했다고 한다.
가족회의에서 리더는 가정에서의 위치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매주 한 명씩 차례대로 아이들은 토론을 이끌고 회의 주제를 준비하며 부부는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배우고 아이들은 민주주의 적 회의 진행 방식에 익숙해지며 부모 자식 간이라도 서로 배우고 합의하며 협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회의가 교훈적이라고 하면 자칫 그 주제가 거창할 거라 오해하기 쉬운데 한가지 예를 들면 "매주 쓰레기를 밖에 내놓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인가", "밤에 문단속은 누가 할 것인가" 처럼 사소한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 문제를 놓고 아빠와 아이들이 논쟁을 벌이는데 아빠의 의견은 형제 자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쓰레기 문제와 문단속 문제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빠의 의견이 한국적인 사고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순번제로 하는게 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아빠와 아이들이 한참 동안 양보하지 않은 곳에서 전혜성 부인이 나서 아버지의 제안을 따라보자고 했단다.
"아버지는 가족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밤에 문은 꼭 잠가야 하고 또 쓰레기는 제때 버려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려는 것이지. 아버지는 개인 사정보다는 전체의 입장에서 일이 해결되는 것을 원하시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의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다시 말해, 너희는 '개인 정의'를 주장하고, 아버지는 가족 전체의 안위를 위한 '공동 정의'를 주장하시는 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의 정의에 관심 있지만 아버지는 정의가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시는 거야. 몇 년 있으면 큰아이가 먼저 대학 가서 집을 떠날 테니 당장은 불평등해 보여도 긴 시간을 두고는 어쨌든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갈 테니 말이야. 너희들이 주장하는 순번제와 결국 같은 셈이지? 너무 성급하게 지금 당장의 것만 보지 말고 길게 생각해 보렴. 아마 한국식이라며 싫어하는 방식도 결국 너희들의 주장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야. 서양에서는 시간을 직선의 개념으로 보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며 변화를 진보라고 보지.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는 시간이 순환한다고 믿는다. 환갑도 그렇고 사계절이 있어서 일정한 시간 안에서 빙빙돈다고 생각해. 고로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공평하게 될 거야."
아이들은 당장 마음에 안 들고 미심쩍더라도 일단 '한국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가족 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아가서 어떻게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여 조율하고 합의를 이끄어 내야 하는지 깨우쳐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족회의를 통한 교육의 잠재성은 실로 대단했으며 야단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지키려 했고, 집안 문제도 협조 받을 수 있기에 대화와 공동 경험의 힘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전한다.
출처 :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미국 헌법 제정
1. 미국의 헌법 제정
1776년 7월 4일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13개 주의 대표들이 모여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존 애덤스(John Adams), 로저 셔먼(Roger Sherman),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다섯 사람이 기초한 ‘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선언하고, 이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의 건립을 천명하였다.
1781년 3월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제정(1977년 채택, 1981년 발효)하여, 13개 주정부가 연합한 형태로 국가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앙정부는 사법권을 보유하지 못하는 등 매우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조직이었다.
1787년 새로운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국방·외교·통화 정책을 관장하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행정·입법·사법의 3권 분립 원칙을 수립하고, 연방의회를 2원화하여 상원은 각 주마다 동등하게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1791년 12월 15일에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수정헌법 10개조를 확정하였다. 1797년 헌법이 연방정부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특히 연방 정부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보장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공화주의자(Republicans)들의 주장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10개 조항의 수정안(Amendment)을 헌법에 추가하였다.
이후에도 미국 헌법은 몇 차례 수정이 있었는데, 1795년 2월 7일부터 1992년 5월 7일까지 수정헌법 제11조~제27조의 비준이 있었다. 헌법 조문 전체 내용은 미국 헌법 전문(全文) 및 수정 헌법 전문(全文)을 참조할 수 있다
1781년 3월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제정(1977년 채택, 1981년 발효)하여, 13개 주정부가 연합한 형태로 국가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앙정부는 사법권을 보유하지 못하는 등 매우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조직이었다.
1787년 새로운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국방·외교·통화 정책을 관장하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행정·입법·사법의 3권 분립 원칙을 수립하고, 연방의회를 2원화하여 상원은 각 주마다 동등하게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1791년 12월 15일에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수정헌법 10개조를 확정하였다. 1797년 헌법이 연방정부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특히 연방 정부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보장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공화주의자(Republicans)들의 주장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10개 조항의 수정안(Amendment)을 헌법에 추가하였다.
이후에도 미국 헌법은 몇 차례 수정이 있었는데, 1795년 2월 7일부터 1992년 5월 7일까지 수정헌법 제11조~제27조의 비준이 있었다. 헌법 조문 전체 내용은 미국 헌법 전문(全文) 및 수정 헌법 전문(全文)을 참조할 수 있다
2. 미국 연방대법원의 전개
건국 초기 연방법원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말에 따르면 “가장 힘이 약한 정부 부서”로 불릴 만큼, 사법부의 권위가 미약하였다.
그러나 1801년 존 마셜(John Marshall) 연방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일련의 판례를 통해 연방대법원의 법률심사(judicial review), 연방법 우위(federal supremacy)의 원칙 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연방대법원 스스로의 권한을 확대하고, 법치주의를 통해 사회 갈등을 봉합하고 경제 발전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사법부는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이자,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존 마셜 대법원장의 판례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베리 판결: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결에서 헌법상 명문 규정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위헌성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연방대법원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의 법률위헌심사권을 확립하였다.
· 마틴 판결: 1816년 마틴 대 헌터(Martin v. Hunter's Lessee) 판결에서 주(州)대법원의 최종판결이라도 연방법률이나 연방헌법상 문제가 있을 때는 연방대법원이 항소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 맥컬라크 판결: 1819년 맥컬라크 대 매리랜드(McCulloch v. Maryland) 판결에서 “필요하고도 적절한(necessary and proper)” 권리 조항에 의하여 연방법률이 주정부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첨예화된 노예 제도 폐지 논란에 연방대법원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1865년 남북전쟁 종식 이후 수정헌법 제13조를 통해 노예 제도의 폐지를 규정하였다. 이어 수정헌법 제14조 및 제15조를 통해 흑인들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와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는 스코트 대 스탠포드(Scott v. Sandford) 판결과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이 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은 스코트 판결을 통해 노예제도는 주정부의 고유 권한으로 연방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노예제도를 금지한 연방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또한 1896년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판결(Plessy v. Ferguson )을 통해 “분리되었으나 동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논리를 내세워 흑백 분리 교육을 합헌으로 결정하였다.
20세기 초반 산업화를 거치면서, 연방대법원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를 우선시하며, 노동자의 권익 및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 센크 대 미국(Schenck v. United States) 판결이 있는데, 1919년 연방대법원은 센크 판결에서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 존재하는 경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이후 보수주의로 치닫던 연방대법원은 1953년 얼 워런(Earl Warren)이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게 되면서 진보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판결을 통해 정부의 권력은 축소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다. 얼 워런 대법원장은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얼 워런은 연방대법원장 재직 이후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진보주의적 판결을 내렸는데, 그는 재직 기간 중 29개의 선판례를 번복하였다.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의 판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브라운 판결: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에서 흑백 분리 교육은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권 위배임을 선언하여, 1896년의 플레시 판례를 번복하였다.
· 맵 판결: 1961년 맵 대 오하이오(Mapp v. Ohio) 판결에서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증거의 재판 채택을 부인하였다.
· 미란다 판결: 1966년 미란다 대 애리조나(Miranda v. Arizona) 판결에서는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고지하지 않고 받은 자백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1980년대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Rehnquist)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얼 워런 대법원장의 진보주의적 헌법 해석에 제동이 걸리고, 보수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특히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헌법 해석에 있어 첫째 “어구의 자명한 의미(plain meaning approach)”에 의거하지만, 이로 불충분할 경우에는 “입법 의도(legislative intent)”를 규명해야 하며, 만약 이로써도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였을 경우, 사법부의 헌법 해석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사법 진보주의(judicial liberalism)’와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의 구분이 생기고,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법부가 ‘엄격한 위헌심사(strict scrutiny)’의 잣대로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와 ‘협의적 헌법해석(strict construction)’에 집착하는 ‘사법 제한주의(judicial restraint)’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1801년 존 마셜(John Marshall) 연방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일련의 판례를 통해 연방대법원의 법률심사(judicial review), 연방법 우위(federal supremacy)의 원칙 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연방대법원 스스로의 권한을 확대하고, 법치주의를 통해 사회 갈등을 봉합하고 경제 발전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사법부는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이자,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존 마셜 대법원장의 판례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베리 판결: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결에서 헌법상 명문 규정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위헌성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연방대법원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의 법률위헌심사권을 확립하였다.
· 마틴 판결: 1816년 마틴 대 헌터(Martin v. Hunter's Lessee) 판결에서 주(州)대법원의 최종판결이라도 연방법률이나 연방헌법상 문제가 있을 때는 연방대법원이 항소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 맥컬라크 판결: 1819년 맥컬라크 대 매리랜드(McCulloch v. Maryland) 판결에서 “필요하고도 적절한(necessary and proper)” 권리 조항에 의하여 연방법률이 주정부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첨예화된 노예 제도 폐지 논란에 연방대법원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1865년 남북전쟁 종식 이후 수정헌법 제13조를 통해 노예 제도의 폐지를 규정하였다. 이어 수정헌법 제14조 및 제15조를 통해 흑인들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와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는 스코트 대 스탠포드(Scott v. Sandford) 판결과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이 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은 스코트 판결을 통해 노예제도는 주정부의 고유 권한으로 연방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노예제도를 금지한 연방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또한 1896년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판결(Plessy v. Ferguson )을 통해 “분리되었으나 동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논리를 내세워 흑백 분리 교육을 합헌으로 결정하였다.
20세기 초반 산업화를 거치면서, 연방대법원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를 우선시하며, 노동자의 권익 및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 센크 대 미국(Schenck v. United States) 판결이 있는데, 1919년 연방대법원은 센크 판결에서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 존재하는 경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이후 보수주의로 치닫던 연방대법원은 1953년 얼 워런(Earl Warren)이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게 되면서 진보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판결을 통해 정부의 권력은 축소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다. 얼 워런 대법원장은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얼 워런은 연방대법원장 재직 이후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진보주의적 판결을 내렸는데, 그는 재직 기간 중 29개의 선판례를 번복하였다.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의 판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브라운 판결: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에서 흑백 분리 교육은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권 위배임을 선언하여, 1896년의 플레시 판례를 번복하였다.
· 맵 판결: 1961년 맵 대 오하이오(Mapp v. Ohio) 판결에서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증거의 재판 채택을 부인하였다.
· 미란다 판결: 1966년 미란다 대 애리조나(Miranda v. Arizona) 판결에서는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고지하지 않고 받은 자백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1980년대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Rehnquist)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얼 워런 대법원장의 진보주의적 헌법 해석에 제동이 걸리고, 보수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특히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헌법 해석에 있어 첫째 “어구의 자명한 의미(plain meaning approach)”에 의거하지만, 이로 불충분할 경우에는 “입법 의도(legislative intent)”를 규명해야 하며, 만약 이로써도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였을 경우, 사법부의 헌법 해석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사법 진보주의(judicial liberalism)’와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의 구분이 생기고,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법부가 ‘엄격한 위헌심사(strict scrutiny)’의 잣대로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와 ‘협의적 헌법해석(strict construction)’에 집착하는 ‘사법 제한주의(judicial restraint)’로 구분되었다.
출처 : 미국 개황, 2009, 외교통상부
<정원 일의 즐거움>에 부치는 글
정원의 시인 헤르만 헤세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연의 매력이 마음에 들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들판을 마구 짓밟고, 마침내는 꽃과 가지를 꺾는다. 그러고는 금세 그것들을 내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와 시들 때까지 방치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 되면 그런 애정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선량한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는 것이다.
<페터 카멘친트> 중에서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정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상상력을 좇아 살아 가는 자연의 일부분을 만들어 내는 정원사의 일은 시인의 일과도 비슷한 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정원사는 시인이 언어를 사용해서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한다. 즉 시인은 읽는 사람에게 새롭고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또 언어가 사물의 본 모습을 오나전히 드러내도록, 즉 언어가 생명을 갖도록 단어를 서로 조합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 온 것이 실현되자. 늘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방랑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의 본성은 미래에 다가올 변화를 예고 한다.
나는 이제 내 정원 안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를 보며 마음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동경을 읽어 보린 것은 아니다.
1908년 바젤로 부친 편지에서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헤세는 강압에 대항하여 193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집필한 소설<유리알 유희>에서 자신이 생각해 온 또 다른 대안적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교리적인 방식으로, 여러 분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치적으로 양극화한 사회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의 교육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헤세는 관련된 사람들, 즉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압제"의 희생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했으며, 수백여 명의 이주자들과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대단한 행동력을 발휘해서 동참하고 지원했다.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으며, 자금을 지원하거나 조언을 하는 등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진영으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 보내 온 수천 통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면서 계몽하는 일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자원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보증을 서주거나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자를 주선해 주는 일 따위도 기꺼이 했다. 집단적이고 파국적인 권력에 대항해서 헤세는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능력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썼다.
<유리알 유희>라는 작품은 서기 2400년 이라는 미래의 한 시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돌이켜 바라보도록 구상한 미래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25세기에서 바라보는 20세기란 살벌한 기계화 시대로 회상된다. 헤세는 인간의 정신과 언어가 진실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을 통해서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두 원칙의 투쟁을 승화시켜 하나의 협화음으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연의 매력이 마음에 들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들판을 마구 짓밟고, 마침내는 꽃과 가지를 꺾는다. 그러고는 금세 그것들을 내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와 시들 때까지 방치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 되면 그런 애정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선량한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는 것이다.
<페터 카멘친트> 중에서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정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상상력을 좇아 살아 가는 자연의 일부분을 만들어 내는 정원사의 일은 시인의 일과도 비슷한 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정원사는 시인이 언어를 사용해서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한다. 즉 시인은 읽는 사람에게 새롭고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또 언어가 사물의 본 모습을 오나전히 드러내도록, 즉 언어가 생명을 갖도록 단어를 서로 조합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 온 것이 실현되자. 늘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방랑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의 본성은 미래에 다가올 변화를 예고 한다.
나는 이제 내 정원 안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를 보며 마음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동경을 읽어 보린 것은 아니다.
1908년 바젤로 부친 편지에서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헤세는 강압에 대항하여 193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집필한 소설<유리알 유희>에서 자신이 생각해 온 또 다른 대안적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교리적인 방식으로, 여러 분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치적으로 양극화한 사회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의 교육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헤세는 관련된 사람들, 즉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압제"의 희생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했으며, 수백여 명의 이주자들과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대단한 행동력을 발휘해서 동참하고 지원했다.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으며, 자금을 지원하거나 조언을 하는 등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진영으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 보내 온 수천 통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면서 계몽하는 일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자원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보증을 서주거나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자를 주선해 주는 일 따위도 기꺼이 했다. 집단적이고 파국적인 권력에 대항해서 헤세는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능력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썼다.
<유리알 유희>라는 작품은 서기 2400년 이라는 미래의 한 시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돌이켜 바라보도록 구상한 미래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25세기에서 바라보는 20세기란 살벌한 기계화 시대로 회상된다. 헤세는 인간의 정신과 언어가 진실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을 통해서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두 원칙의 투쟁을 승화시켜 하나의 협화음으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꿈의 집
꿈의 집
삶이라고 하는 것, 죽음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혹의 소리는 실제로 존재하면서 노래 부르고 그를 끌어당기며, 하루하루를 올바른 리듬에 맞춰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길은 고향으로 향해 있었다.
저녁의 숨결이 멀리서부터 불어왔다. 연못에서는 소슬거리는 갈대의 노래가 들려왔다. 밤은 낮에게 소리 내어 외치고, 낮은 밤을 부르고 있었다. 신들의 숨결은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다채로운 색조를 띤 먼 하늘가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겨 주의 깊게 정원을 관찰했다. 그의 눈에 비친 정원은 단지 지금 바라보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와 나무들 그리고 덤불들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애정을 지니고 계속되어 온 만남이었다. 이곳에서 자라고 꽃피운것, 집과 라일락이 핀 외진 곳 사이에 있는 좁지만 손질이 잘된 이곳, 정원 안에 홀로 섬처럼 떨어져 밖으로부터는 어떤 시선도 닿을 수 없는 이 녹음 짙은 곳, 여기서 자란 모든 것은 그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가꾸며 확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은 오히려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커가는 상념과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
"제 말은 진심이에요. 아버지는 나무와 화단과 모든 것들을 정말 생동감 넘치게 잘 배치하셨어요. 이보다 더 멋지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스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얘야, 내게는 결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예를 들면 저 아래 정자 앞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 있지. 그 사이에 마가목을 두세 그루 심었는데 그 때문에 전체가 망가져 버리고 말았단다. 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마가목은 이미 너무 커버려서, 한여름이 되면 푸른 하늘 아래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길게 늘어뜨린단다. 그것을 다시 없애는 것도 잔혹한 일이지겠지. 하지만 전처럼 아카시아 나무만 서 있었더라면 그 편이 훨씬 아름답고 더 조화로웠을 것 같구나. 여기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많아.
식물을 가꾸고 좋은 정원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단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어렵지. 불완전한 것까지도 사랑하려고 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말지. 너야 물론 나보다 잘해 낼 거야. 너도 아니? 의지의 자유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아주 샅샅이 연구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정원일에 몰두해 봐야 한다. 대단찮아 보이는 관목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자라지 않는 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냐! 물론 아니지! 네가 어떤 관목을 골라 심었더라도 그건 완전히 너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단다. 그 배후에는 어떤 무의식적인 바람, 추억, 필연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지.
내가 마가목을 심을 때도 그랬었다. 마가목을 고른 것은 그 모습과 잎이 아카시아 나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다. 훨씬 나중에 가서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게 아니었어. 내가 그 어린 마가목을 갖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식목원에서 그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을 눈여겨보았을 때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정원 한쪽 구석이 떠올랐다는 거야. 식목원으로 찾아가면서는 마가목을 살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거기에서 처음 어린나무를보자 갑자기 어린 시절의 한때와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산것이란다".
그는 조용히 웃었다.
.......
"젊었을 때는 말이다. 한스야, 자신이 많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고독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친구들을 찾아 나서고,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조국을 찾는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 덕에 세계가 번영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그런 것들이 더는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 때 가서는 우정과 사랑, 조국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전체로부터 떼어 놓는 껍질 같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단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전체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이 전체가 다름아닌 신(神)이란다. 너 중국의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니?"
"없는 것 같은데요. 아뇨. 왜 그러세요?"
"중국의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같은 인물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반복해서 나온단다. 젊은 시절에 그 사람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여 직업을 갖기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 성인이 되어서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간다. 그러다 조국애를 배우고 무엇보다 선조와 자손의 일을 염려하게 되지. 그는 열심히 일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어, 나서서 국가를 끌어가는 일을 돕는다. 그러나 결국 나이를 먹게 되자 자신이 여전히 고독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해온 모든 일들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서, 어느 날 밤 집과 논밭, 아내, 하인들, 직무와 서책을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 속으로 들어가 이슬과 꽃잎만을 먹고 살면서, 자신에게 붙어 있던 껍질을 모두 벗어던져 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불사의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다."
.......
"그 사람들이 꽃잎만 먹고 살았다는 말을 정말 믿으세요?"
"알 수 없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지. 나는 중국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산에 들어가 불사의 사람들과 하나가 된 이들의 경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아마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게다. ...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 결과 세계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신을 믿는 대신에, 뢴트겐 광선에 관한 비밀 따위를 몇 개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런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에 갑자기 구멍을 뚫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보다 훨씬 더 기이하고 놀라운 것임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옛날보다 가난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그 반대로 우리는 어쩐지 갑자기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진짜 중요한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인은 작은 화분을 들어올려 화초가 제대로 심어져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중요한 것이란 도대체 뭐지요?" 한스는 주저하듯이 물었다.
"소박함이란다." 노인은 짧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장난기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신약성서에는 단순함이라고 씌어 있지."
삶이라고 하는 것, 죽음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혹의 소리는 실제로 존재하면서 노래 부르고 그를 끌어당기며, 하루하루를 올바른 리듬에 맞춰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길은 고향으로 향해 있었다.
저녁의 숨결이 멀리서부터 불어왔다. 연못에서는 소슬거리는 갈대의 노래가 들려왔다. 밤은 낮에게 소리 내어 외치고, 낮은 밤을 부르고 있었다. 신들의 숨결은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다채로운 색조를 띤 먼 하늘가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겨 주의 깊게 정원을 관찰했다. 그의 눈에 비친 정원은 단지 지금 바라보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그와 나무들 그리고 덤불들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애정을 지니고 계속되어 온 만남이었다. 이곳에서 자라고 꽃피운것, 집과 라일락이 핀 외진 곳 사이에 있는 좁지만 손질이 잘된 이곳, 정원 안에 홀로 섬처럼 떨어져 밖으로부터는 어떤 시선도 닿을 수 없는 이 녹음 짙은 곳, 여기서 자란 모든 것은 그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가꾸며 확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곳은 오히려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커가는 상념과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
"제 말은 진심이에요. 아버지는 나무와 화단과 모든 것들을 정말 생동감 넘치게 잘 배치하셨어요. 이보다 더 멋지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스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얘야, 내게는 결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예를 들면 저 아래 정자 앞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서 있지. 그 사이에 마가목을 두세 그루 심었는데 그 때문에 전체가 망가져 버리고 말았단다. 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마가목은 이미 너무 커버려서, 한여름이 되면 푸른 하늘 아래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길게 늘어뜨린단다. 그것을 다시 없애는 것도 잔혹한 일이지겠지. 하지만 전처럼 아카시아 나무만 서 있었더라면 그 편이 훨씬 아름답고 더 조화로웠을 것 같구나. 여기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많아.
식물을 가꾸고 좋은 정원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단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어렵지. 불완전한 것까지도 사랑하려고 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말지. 너야 물론 나보다 잘해 낼 거야. 너도 아니? 의지의 자유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아주 샅샅이 연구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정원일에 몰두해 봐야 한다. 대단찮아 보이는 관목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자라지 않는 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냐! 물론 아니지! 네가 어떤 관목을 골라 심었더라도 그건 완전히 너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단다. 그 배후에는 어떤 무의식적인 바람, 추억, 필연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지.
내가 마가목을 심을 때도 그랬었다. 마가목을 고른 것은 그 모습과 잎이 아카시아 나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다. 훨씬 나중에 가서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게 아니었어. 내가 그 어린 마가목을 갖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식목원에서 그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을 눈여겨보았을 때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정원 한쪽 구석이 떠올랐다는 거야. 식목원으로 찾아가면서는 마가목을 살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거기에서 처음 어린나무를보자 갑자기 어린 시절의 한때와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산것이란다".
그는 조용히 웃었다.
.......
"젊었을 때는 말이다. 한스야, 자신이 많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고독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친구들을 찾아 나서고,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조국을 찾는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 덕에 세계가 번영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그런 것들이 더는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 때 가서는 우정과 사랑, 조국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전체로부터 떼어 놓는 껍질 같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단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전체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 이 전체가 다름아닌 신(神)이란다. 너 중국의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니?"
"없는 것 같은데요. 아뇨. 왜 그러세요?"
"중국의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같은 인물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반복해서 나온단다. 젊은 시절에 그 사람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여 직업을 갖기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 성인이 되어서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간다. 그러다 조국애를 배우고 무엇보다 선조와 자손의 일을 염려하게 되지. 그는 열심히 일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어, 나서서 국가를 끌어가는 일을 돕는다. 그러나 결국 나이를 먹게 되자 자신이 여전히 고독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해온 모든 일들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서, 어느 날 밤 집과 논밭, 아내, 하인들, 직무와 서책을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 속으로 들어가 이슬과 꽃잎만을 먹고 살면서, 자신에게 붙어 있던 껍질을 모두 벗어던져 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불사의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다."
.......
"그 사람들이 꽃잎만 먹고 살았다는 말을 정말 믿으세요?"
"알 수 없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지. 나는 중국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산에 들어가 불사의 사람들과 하나가 된 이들의 경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아마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게다. ...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 결과 세계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신을 믿는 대신에, 뢴트겐 광선에 관한 비밀 따위를 몇 개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런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에 갑자기 구멍을 뚫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보다 훨씬 더 기이하고 놀라운 것임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옛날보다 가난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그 반대로 우리는 어쩐지 갑자기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진짜 중요한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인은 작은 화분을 들어올려 화초가 제대로 심어져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중요한 것이란 도대체 뭐지요?" 한스는 주저하듯이 물었다.
"소박함이란다." 노인은 짧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장난기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신약성서에는 단순함이라고 씌어 있지."
정원 일의 즐거움 (II)
대립되는 것
정원에서 띄우는 작은 편지들
헨네트 남작 부인에게
이 세계는 암울해 보입니다. 그래도 역시 봄은 오고, 어느 꽃이나 다 영원하고 쾌활한 웃음을 보여 줍니다.[1942. 3월]
크루트 비드발트에게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세계는 자주 시끄러움과 불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과 수목은 변함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날인가 지상이 완전히 콘크리트 상자들로 덮여 버린다 할지라도, 구름들의 유희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술의 도움을 빌려, 여기저기에 신성한 곳으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1949.1월]
지나치게 고가로 팔리는 너무도 우둔한 이 낙관주의. 그것은 전쟁과 비참함, 죽음과 고통을 그저 사람들의 어리석은 환상으로 치부한다. 그러면서 어떤 근심이나 문제 따위는 알려고 들지 않는다. 이 지나치게 거대한 미국식 모형을 본떠 키워진 낙관주의로 인해 정신은 자극받고 과장되고 억눌린다. 그리하여 한쪽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또한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적대감을 갖고서 분홍빛을 띤 어린아이의 세계를 거부하려고 한다. 이런 유의 사고는 시류를 따르는 철학자들의 저서나 잡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이웃인 두 그루의 나무. 경이로울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목련나무와 놀랍게도 비물질화되고 순수한 정신으로 남은 난쟁이 분재 사이에 앉아, 나는 그 두개의 대립물이 벌이는 유희를 관찰하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더운 날씨에 약간 졸기도 한다. 담배를 조금 피우면서 저녁이 되어 서늘해진 공기가 숲으로 부터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처에서, 내가 행동하고 읽고 생각하는 것 안에서, 오늘날의 세계가 겪는 것과 똑같은 분열이 내게도 부딛쳐 온다. 매일같이 몇 통의 편지를 받는다. 모르는 사람들한테서 온 편지들도 많다. 대개는 좋은 의도와 좋은 마음으로 쓴 것들이다. 나에게 동의하는 내용도 있고, 이따금 불평하는 내용도 있다. 모두가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하나같이 거칠고 닦이지 않은 낙관주의다. 그들은 비관주의 자인 나를 마음껏 질책하거나 비웃거나 서글프게 여기곤 한다. 때로 그들은, 내가 깊은 궁핍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현실을 과장하고 환상적으로 볼 권리를 주기도 한다.
물론 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자로서, 둘다 권리를 갖고 있다. 다만 나는 전자를 좀더 위험하다고 간주한다....
그 두 그루의 대립한 채 서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사물들처럼 정작 대립 자체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 둘 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지닌 권리를 확신하고 있으며, 둘 다 강인하고 질기다. 목련나무는 수액이 끈끈하게 넘쳐 오르며 그 풍성한 꽃잎들은 후텁지근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난쟁이 분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더욱 깊이 침잠한다.[1928년]
정원에서 띄우는 작은 편지들
헨네트 남작 부인에게
이 세계는 암울해 보입니다. 그래도 역시 봄은 오고, 어느 꽃이나 다 영원하고 쾌활한 웃음을 보여 줍니다.[1942. 3월]
크루트 비드발트에게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세계는 자주 시끄러움과 불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과 수목은 변함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날인가 지상이 완전히 콘크리트 상자들로 덮여 버린다 할지라도, 구름들의 유희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술의 도움을 빌려, 여기저기에 신성한 곳으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1949.1월]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I)
Freude am Garten
고독하고 의연한 나무들
고독하고 의연한 나무들
......
나무들은 성스럽다. 나무에 귀 기울이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체험한다. 나무들은 무슨 교훈을 설교한다거나 처방을 내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나무는 개별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지만 삶의 근원적인 법칙을 알려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생각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자연의 어머니는 나와 더불어 전례가 없던 일을 시도한다. 내 모습과 내 피부 밑에 흐르는 혈관은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 우듬지에 매달린 가장 작은 잎사귀가 벌이는 유희, 내 가지에 난 아주 작은 상처조차 유일한 것이다. 내 사명은 바로 그런 일회적인 것 속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믿음이야말로 나의 힘이다. 나는 조상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해마다 내 몸에서 탄생하는 수천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내 씨앗 속에 간직된 비밀을 지닌 채 마지막까지 살아간다. 그 밖에 어떤 것도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의무가 성스럽다고 믿는다. 이 믿음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우리들이 서글퍼져 더 이상 삶을 버텨내기 힘들어질 때, 나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조용히 하라! 조용히 하라! 나를 바라보라! 삶은 쉬은 것이 아니다.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모두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신이 네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하라. 그리고 너는 침묵하라.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가는 길이 너를 어머니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딛는 걸음마다, 매일 매일이 너를 새롭게 어머니에게 이끌어 간다. 고향이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향은 너의 내면에 있든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밤바람에 소슬거리는 나무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가만히 오랫동안 귀 기울이노라면, 방랑하고 싶은 마음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방랑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려는 동경이다. 삶의 새로운 비유를 찾으려는 동경이다. 방랑은 고향집으로 이끌어 간다. 모든 길은 고향집으로 향해 있으며, 모든 걸음은 탄생이다. 모든 걸음은 죽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다.
그처럼 나무는 저녁에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불안해 할 때 솨솨 소리를 내며 말한다. 나무들은 긴 생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보다 더 오래 살며, 호흡은 길고 고요하다. 우리가 나무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보다 현명하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서 생각이 짧고 어린애같이 서두르는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젖는다. 나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사진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1918년]
그 무엇도 내 성공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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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사명을 활용하라(Make your mission possible)
지금 몸 담은 조직의 사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보자. 사명을 복사해서 회의 때도 갖고 들어가거나 달력이나 PDA 같은 곳에 기록해 두자. 직접 작성하는 보고서에서도 그 내용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보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낸 아이디어를 한 단계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드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면 회사 사명을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 하나 따져보자.
- 적극적으로 들어라(Listen actively)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들어라. 적극적으로 듣는 자세를 보여주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된다.이렇게 되면 서로 신뢰가 쌓이게 되고 상대방이 이후에도 정보를 공유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을 '압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대화에 임하는데, 이러한 생각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중간에 끼어들게 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에게 정신을 집중하면서 정면으로 눈을 들여다보라. 그 사람의 태도나 몸짓 같은 것을 지켜보라. 이것도 대화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좋다고 말하지만 정작 몸짓에서는 싫다는 속마음이 저절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경영자는 "직원들이 무슨 질문을 합니까?'라고 물어본다. 이들은 사람이 질문을 할 때 그 사람의 생각이나 적극성이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 태도를 가져라(Stay open to other wiewpoints)
누군가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다르다면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게 전달하는 기술도 중요하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라고 말하라 이는 "당신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제 생각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 말에도 귀를 귀울인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래도 상대방이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면 왜 여러분 의견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라.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요점만 짚어서 이야기를 풀어 가라. 그래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면 그 중 가장 높은 사람이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만일 여러분이라면, 자기 생각대로 밀어부치겠다는 말 대신 사실 지금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내가 책임자이다 보니 최선의 길이라고 여기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라. 또한 상대방에게 내 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필수다.
- 평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라(Excel at giving feedback)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다.
o 동료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수시로 평가해주고 싶다고 말하라.
o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라 해도 처음에는 긍정적인 말로 시작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많이 배웠을 테고, 실제로 일을 잘하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해보라. 부정적인 이야기도 긍정적인 이야기로 포장하면 받아들이기가 좀 더 수월해진다. 물론 실제로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상대방이 이러한 점을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o 가능하면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평가하면 좋다. "평균 고객 만족도가 75점인데 비해 당신은 65점이다. 평균 수준에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몇 가지만 알려주고 싶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면 상대방도 인신공격이라는 인상을 덜 받게 된다.
- 곤란한 이야기를 피하지 말라( Face up to difficult conversation)
곤란한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한 축이다. 동료에게 민감한 이야기를 하거나 ... 괄괄한 직원이나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모두 힘들고 복잡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솔직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는 태도로 대화에 임하라. 당연히 힘들다. 무슨 말을 할지 노트에 기록해 본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 미리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사적인 자리에서, 차분한 분위기에서 나누도록 한다... 내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그러한 이야기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간결하게, 핵심 주제만 논의한다는 원칙만 분명히 지키자.
- 화는 건설적으로 내라(Express anger constructively)
화가 난다는 것은 특정 상황에 대해 반응하는 데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화를 드러내는 것은 자제력을 잃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자제력을 잃는 것은 부적절하며 독단적인 처신이다. 그러면 당장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약점일 뿐이다....
사람은 모욕감을 느낄 때 잘 대처하지 못한다. 여러분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동료들이 건설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바로 핵심 이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꺼낸다.만약 상대방이 한 이야기가 논점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으면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말한다.사실 여부는 명확하게 규명하고 솔직하게 답하면서 압으로는 어떤 식으로 일이 처리되었으면 좋겠는지 분명하게 제안한다." 그 논리는 제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중요한 고객사를 잃었습니다. 어쨌든 그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중요한 고객사를 잃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저나 같은 팀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하십시오." 여러분이 우려하는 바를 건설적으로 표현하면 상대방도 열린 태도로 받아 들이고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 책임감은 시작 단계에서 판가름난다(Accountability begins at the beginning)
팀원들에게 일을 나누어 줄 때는 어떤 부분을 완수하라고 분명하게 전달한다.일단 일이 끝난 다음에는 책임 소재를 따지기 어려운 법이니 그러한 부분은 애초에 분명히 하고 시작하자.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할지, 언제까지 할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평가할 것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을 경우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인지도 일러준다. 이 부분은 특히 명확하게 표현하라. .. 그리고 이러한 전달사항에 대해 팀원들이 이메일로 확인 답장을 보내게 하여 서로의 의사를 이해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 윽박지른다고 일을 더 잘하지는 않는다(You can't force someone to be productive)
이 직원이 책임감을 느낄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한 다음 업무 개선 일정을 제시해 주어라. 그래도 이 직원이 그 기준을 맞추지 못한다면 끝난 것이다. 더 이상 그직원에게 집착하지 말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무언가 다른 반응을 기대해 보아야 좌절감만 떠 안게 될 뿐이다. 동료나 직원 중에 계속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기다려주지 말라... 그 사람이 과거와는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십상이다.
- 스스로 하게 하라(Let your people perform)
사람은 남에게 지시 받을 때보다는 스스로 일할 때 더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니 팀원에게도 필요한 정보를 주었다면 나머지는 직접 하게 내버려 두어라.
조직의 목표를 세운 뒤 실행 계힉을 만든다. 각 팀원들에게 개인 업무 목표와 실행 계획ㅇㄹ 만들게 한 후 조직 전체의 전략과도 일치하게 한다.
-불평 불만꾼 대처법(Overcom the kings and queens of chaos)
불평불만꾼들은 잘못된 정보를 들었을 때 힘이 솟는다. 따라서 수시로 대화하면서 그 잘못된 정보를 제거하는 데 주력한다 /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라. 극단적인 불평꾼들은 원래 계획이 문제가 있었고 자기가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의도적으로 일을 그르친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 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단지 두려운 것 뿐이다.
- 인간관계 레이더를 만들어라(Set up a relationships radar screen)
여러분을 이끌어주거나 무언가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면 연락처를 꼭 받아서 잘 기록해 둔 후 인간관계의 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얼마나 밀접한 관계인지에 따라 아주 가까운 사람은 일주일마다. 그렇지 않으면 매달 또는 몇 달에 한번씩은 점검해야 한다. 최근에 누구와 연락을 소홀히 했는지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자. 시간 날 때 전화하든, 직접만나든지 하자.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접했다면 스크랩해서 간단한 메모와 같이 보내라. "이 내용이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보냅니다. 항상 평안하십시오" 정도면 족하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도울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라. 그리고 누가 크게 성공했으면 축하해주고 극히 곤란한 상태에 처했다면 도움을 아끼지 말라.
- 부하직원 지도는 꾸준하게(Coach your team all day long)
부하 직원 지도할 때는 일대일로 한다. 먼저 상대방에게 자기가 어떤 일을 잘하는지 목록을 만들고, 또 어떤 일이 다소 미진했는지도 따로 목록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그 중 세 가지를 택하게 한다. 다음 단계는 각 사항과 관련된 목표를 설정하는 단계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는 매주 열리는 부서회의에서 내 팀을 대표해서 프리젠테이션을 해보겠다"는 식이다. 상대방이 잘하는 일이 무멋인지, 그 점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짚어준다. "자네는 남보다 치말한 편이니깐 프리젠테이션 할 때도 그 점을 잘 살려보는 것이 좋겠는데" 정도면 충분하다. 상대방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러분이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정말 신뢰할 때)누군가 자신을 신뢰한다고 느끼면 없던 힘도 솟아난다.
그 사람이 일하는 것을 계속 지켜 보면서 더 좋아진 점이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말라, 하지만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다면 둘만 있을 때 어떤 점을 도와줄지 아니면 어떤 부분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다.
- 잠시 쉬어 가야 할 때(Know when to take a deep breath)
누가 언짢게 괴롭히고 짜증나게 한다 해도 버럭 화 내지 말라. 그러면 혼자 더 괴로울 뿐이고 잘못하다가는 직장에서 쫒겨나기 십상이다. '계속 이일을 해야 하나, 정말 못해 먹겠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매우 위험한 상태이니 잠깐만 냉정을 찾자. 우선 심호흡부터하자.
o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상기한 후 해결책을 찾는데 집중한다.
o 지금 짜증나는 일이 반년 뒤, 아니 한달 뒤에도 계속 짜증날지 생각해 본다.
o 세상은 넓다는 것을 잊지 말라. 여러분이 실수 좀 한다고 해도 지구는 돈다.
그리고 아래의 행동은 피하자.
o 다른 사람더러 일 못한다고 나무라기,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소리지르기, 충동적으로 결정하기
당장 보기에 아무리 급박한 일이라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저 스쳐가는 순간일 뿐이다. 그 짧은 순간에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을 충독적으로 내리지 말라. 냉정함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 그 무엇도 내 성공을 막을 수 없다(Nothing or nobody can affect you negatively)
철학은 한 개인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꿰뚫보았을 때 나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평가하는 것이고 남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당장 해야 할 것에만 정신을 집중하라. 자꾸 마음을 다잡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일에 치어 살면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여유마저 사라져 버린다. 계속 급한 일들이 쏟아지면 조급함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업무 효율도 낮아진다.
너무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은 시야가 좁아진다. 이 때 좀더 넓은 시각을 기르려면 지금 버릇이나 행동, 사고방식이 내 일과 인간관계, 그리고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끔씩 도저히 그러한 것이 보이지 않을 때면 마치 등산하는 것처럼 지금 있는 곳을 떠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아야 한다. 일단 정상에 다다르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아주 광범위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재충전할 시간도 생긴다.
자기 시야를 확보한다는 것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가능한 것이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길러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는 경험을 쌓아라. 그러면 균형감각도 길러지고 고갈되었던 아이디어도 채울 수 있으며 인생도 즐거워질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로는 시련이 찾아 오지만 이겨낼 수 있다. 이 저자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거기서 최대한 많은 것을 깨우치려고 노력했단다. 그럴 때면 항상 나는 누구이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만의 사명은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는 더 강해졌고, 오히려 더 행복해졌단다. 마침내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게 되어 지금은 그러한 사실에 감사하다고 한다.
같이 일하는 직원 땜에 본의 아니게 힘든 일이 많았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미래형일 듯 싶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내가 그를 받아 들이는 일이 예전보다 더 수월해지며 내가 더 많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반신욕을 즐기곤 하는데 어느날 서재 한 켠에 꼽혀진 이 책, 그 누구도 산 기억이 없으니 좀 젖어도 괜찮아하며 기대없이 집어 든 책.
결론부터 말하면 내게는 기대 이상의 책이었다. 지금 내 처해진 환경에 너무나도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책으로 여러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배우고 또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언제라도 생활속에 실천하고자 책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놨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언제나 핵심이듯 내가 흔들릴 때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본만이라도 유지해보자 차원에서 말이다. ^^ 주님께서 내게 큰 복과 함께 보내주신 십자가를 통해 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바로 선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말이다.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미국여성 시인
필리스 위클리(Phillis Wheatley, 1753?~1784) 가 펴냈던 책의 원제는 <종교와 도덕을 비롯한 여러 주제에 관한 시 Poems on Various Subjects, Religious and Moral>이다.
런던에서 출간된 이 책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작은 선풍을 일으켰다. 필리스의 시 대부분은 고생스러운 인생살이와 가족의 죽음, 특히 어린아이의 죽음을 다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시집은 신선하게도 서문 대신 그녀의 모습을 실었다. 동판화로 제작한 여자 노예, 아니 미국 여성의 모습을 책에 실은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노예인 여자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정말로 필리스가 시를 썼는지 의심했고, 보스턴의 고위 관리 18명이 필리스가 이 시의 저자임을 증명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녀가 썼던 첫번째 시는 <허시 씨와 커핀 씨>였다. 이 시는 바닷가에서 험한 풍랑을 만난 어부 두 명이 끊임없이 신에게 간구해 마침내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1770년 9월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던 조지 화이트필드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필리스는 그를 기리는 애가를 지었고, 그 작춤이 북미 식민지의 수많은 신문에 실리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필리스의 시는 그녀가 자랐던 미국의 청교도주의 바탕을 두었고, 당시 뉴잉글랜드의 가치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필리스의 목소리는 노예 문제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1830년대에 노예폐지론자들이 필리스의 시를 다시 인쇄하기도 했다. 필리스의 삶은 이후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출처 : 판도라의 도서관 여성과 책의 문화 중 P.149
런던에서 출간된 이 책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작은 선풍을 일으켰다. 필리스의 시 대부분은 고생스러운 인생살이와 가족의 죽음, 특히 어린아이의 죽음을 다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시집은 신선하게도 서문 대신 그녀의 모습을 실었다. 동판화로 제작한 여자 노예, 아니 미국 여성의 모습을 책에 실은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노예인 여자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정말로 필리스가 시를 썼는지 의심했고, 보스턴의 고위 관리 18명이 필리스가 이 시의 저자임을 증명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작품을 쓰고 있는 필리스 위클리
<종교와 도덕을 비롯한 여러 주제에 관한 시>의 표지
1773년 스키피오 무어헤드(1770년대 활동)의 동판화
그녀가 썼던 첫번째 시는 <허시 씨와 커핀 씨>였다. 이 시는 바닷가에서 험한 풍랑을 만난 어부 두 명이 끊임없이 신에게 간구해 마침내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1770년 9월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던 조지 화이트필드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필리스는 그를 기리는 애가를 지었고, 그 작춤이 북미 식민지의 수많은 신문에 실리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필리스의 시는 그녀가 자랐던 미국의 청교도주의 바탕을 두었고, 당시 뉴잉글랜드의 가치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필리스의 목소리는 노예 문제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1830년대에 노예폐지론자들이 필리스의 시를 다시 인쇄하기도 했다. 필리스의 삶은 이후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출처 : 판도라의 도서관 여성과 책의 문화 중 P.149
판도라의 도서관
여성과 책의 문화사
세계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작가는 약 4300년 전에 살았던 수메르의 공주 였으며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 중 한명은 바로 그리스의 사포라고 한다. 일본의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여성 최초로 소설을 썼으며 중세 유럽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인 킬데어의 브리지다와 독일 출신인 빙겐의 힐데가르트 같은 수녀들이 수녀원에서 지식을 지켜냈다고 한다.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었고, 여성에게 필요한 지식과 능력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었기에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지식 활동에 폭넓게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식으로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었다. 또한 사람들은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역효과를 낳는다고 믿었다. 여성이 책을 읽게 되면 아이들을 양육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며 남편이 편안하도록 돌보는 일, 즉 가정에 대한 책임을 소홀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에 독서는 단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단다.
화가 폴 고갱의 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1803-0844)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 여성들을 가르치다가 건강을 해쳤으며 그리스 출신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던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 히파티아Hypatia(355-415)나 프랑스 혁명기의 여권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1748-1793)은 모두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폭도들에게, 올랭프 드 구즈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640년대에는 지속적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도서 출판이 성시를 이뤘고, 근대 초기의 여성 독자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많은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여성들이 읽는 책은 여전히 종교 서적이 주종을 이뤘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부유한 집안 출신 여성들은 이제 지리책, 여행 문학, 순수 문학과 희곡 같은 분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생 공화국인 미국에서도, 독서는 상류 계급이 일반적인 활동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모범에 따라 여성들의 사교 모임(남성의 역으로 제한되었던 문학 클럽과는 성격이 달랐다)에서 고전 문학을 논하는 일이 점차 인기를 얻었다. 1800년 무렵에는 영국 출신 미국 여성의 절반이 알파벳을 읽을 줄 알았으며 19세기 말에서야 여성 독자들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어느 정도 독립을 얻었다. 여성 고등 교육의 확대도 30세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오하이오 주 소재 오벌린 대학(1833년 설립)은 동등한 조건에서 남녀 학생을 받아 들인 미국 최초의 대학(1838년 졸업한 여학생은 단 한명)이었으며 미시건, 캘리포니아, 위스콘신 대학등 주립대학들은 1850-1860년대 사이에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여자대학인 레이디 마가렛 홀에서 1879년에 여학생 9명을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는 1948년에야 소속 여자대학 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했으며 미국대학교에서는 1861-1900년 사이에 대략 1,700명의 여성 박사가 배출되었지만, 영국의 여성 박사 학위자는 100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공립학교 제도가 생긴 다음에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교과 과정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19세기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여성이 읽을 책은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여성들에게는 종교서적이나 유익한 정보서, 몇몇 여행서, 가벼운 전기물, 도덕심을 고양하는 책이나 오락물만 허용되었다.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는 여성의 지적 해방과 기록된 글의 잠재적 전복 효과를 두려워했으며 남성은 여성의 정신이 너무나도 나약하므로 외부의 영향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단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에서 보듯 여성의 지적 능력이 해방되는데 남성들이 갖는 두려움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최상위층에서도 책을 많이 읽고 학문을 좋아하는 여성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말참견하는 여자'를 뜻하는 '비라고Virago'라는 단어는 학문을 좋아하는 여성을 폄하하는 말이었으며, 여성의 지적 관심을 좌절시키는데 이용되었다. 별다른 악의 없이 "독서는 마음에 주름을 만들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주름을 만든다!"라고 떠들어 대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남녀가 분리된 열람실을 주장했다가 결국 여성에게 개방하게 된 사례는 여성의 책읽기를 통제하려는 남성의 시도가 힘을 잃었으며 여성이 더욱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꾸준히 진보가 이루어졌다. 한때 귀족들의 독점적 특권이었던 독서는 점차 대중의 활동이 되었다. 21세기 현재는 여성의 독서와 교육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지만 가난과 억압으로 어쩔 수 없이 지식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여성은 여전히 이 같은 공공의 권리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세계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작가는 약 4300년 전에 살았던 수메르의 공주 였으며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 중 한명은 바로 그리스의 사포라고 한다. 일본의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여성 최초로 소설을 썼으며 중세 유럽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인 킬데어의 브리지다와 독일 출신인 빙겐의 힐데가르트 같은 수녀들이 수녀원에서 지식을 지켜냈다고 한다.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었고, 여성에게 필요한 지식과 능력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었기에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지식 활동에 폭넓게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식으로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었다. 또한 사람들은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역효과를 낳는다고 믿었다. 여성이 책을 읽게 되면 아이들을 양육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며 남편이 편안하도록 돌보는 일, 즉 가정에 대한 책임을 소홀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에 독서는 단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단다.
화가 폴 고갱의 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1803-0844)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는 여성들을 가르치다가 건강을 해쳤으며 그리스 출신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던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 히파티아Hypatia(355-415)나 프랑스 혁명기의 여권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1748-1793)은 모두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폭도들에게, 올랭프 드 구즈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640년대에는 지속적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도서 출판이 성시를 이뤘고, 근대 초기의 여성 독자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많은 종류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여성들이 읽는 책은 여전히 종교 서적이 주종을 이뤘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부유한 집안 출신 여성들은 이제 지리책, 여행 문학, 순수 문학과 희곡 같은 분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생 공화국인 미국에서도, 독서는 상류 계급이 일반적인 활동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모범에 따라 여성들의 사교 모임(남성의 역으로 제한되었던 문학 클럽과는 성격이 달랐다)에서 고전 문학을 논하는 일이 점차 인기를 얻었다. 1800년 무렵에는 영국 출신 미국 여성의 절반이 알파벳을 읽을 줄 알았으며 19세기 말에서야 여성 독자들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어느 정도 독립을 얻었다. 여성 고등 교육의 확대도 30세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오하이오 주 소재 오벌린 대학(1833년 설립)은 동등한 조건에서 남녀 학생을 받아 들인 미국 최초의 대학(1838년 졸업한 여학생은 단 한명)이었으며 미시건, 캘리포니아, 위스콘신 대학등 주립대학들은 1850-1860년대 사이에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여자대학인 레이디 마가렛 홀에서 1879년에 여학생 9명을 처음으로 받아 들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는 1948년에야 소속 여자대학 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했으며 미국대학교에서는 1861-1900년 사이에 대략 1,700명의 여성 박사가 배출되었지만, 영국의 여성 박사 학위자는 100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공립학교 제도가 생긴 다음에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교과 과정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19세기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여성이 읽을 책은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여성들에게는 종교서적이나 유익한 정보서, 몇몇 여행서, 가벼운 전기물, 도덕심을 고양하는 책이나 오락물만 허용되었다.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는 여성의 지적 해방과 기록된 글의 잠재적 전복 효과를 두려워했으며 남성은 여성의 정신이 너무나도 나약하므로 외부의 영향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단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에서 보듯 여성의 지적 능력이 해방되는데 남성들이 갖는 두려움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최상위층에서도 책을 많이 읽고 학문을 좋아하는 여성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말참견하는 여자'를 뜻하는 '비라고Virago'라는 단어는 학문을 좋아하는 여성을 폄하하는 말이었으며, 여성의 지적 관심을 좌절시키는데 이용되었다. 별다른 악의 없이 "독서는 마음에 주름을 만들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주름을 만든다!"라고 떠들어 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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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니체는 놀잇감에 불과했다/김영민
“만남을 어느별이 도운걸까요” 루 살로메 앞에 선 니체는 그저 눈시린 통속이었지만
그녀에게 연애란 ‘3’의 놀음 둘만의 밀회를 허하지 않았다
동무와 연인/⑦ 루 살로메와 니체-3 혹은 살로메의 아이러니
총명하고 매력적이지만 남자들의 세상과 그 논리에 직수굿하게 응종하기 싫은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목에서 늘어진 스카프가 남자들이 만든 자동차의 바퀴축에 말려들어 운명보다 빠르게 죽어버릴까, 아니면, 남자 한 명이라도 품에 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의 운명을 완결시킬까? 만일 명민한 약자들이 쉽게 빠지는 시적 히스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슬기를 산문적 근기와 이드거니 섞을 수 있다면, 필시 그 여자는 운명보다 느리게 사는 법을 익힐 것이다.
강자의 취향이 약자의 운명으로 주어질 때, 총명한 약자는 흔히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그 운명의 차꼬를 떨쳐버리려 한다. 빈대와 더불어 초가삼간을 태우는 짓은 반드시 어리석은 자들의 몫이 아닌 것이다. 히스테리, 그것은 운명 속에 억압된 약자의 재능이 몸을 통해서 말하는 방식이자 그 몸을 태우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치 헤겔과 대치하는 니체처럼, 남성지배체계 속의 똑똑한 여자들은 시적 히스테리 속에서 주어진 운명과 절망적으로 대치하다가 부실(不實)의 꽃으로 아름답고 슬프게 미쳐간다.
하지만 그녀는 카미유나 밀레바 마리치와 달리 남자-애인을 위해 무료봉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명성 속에 자신의 재능을 동화시킬 수 없는 게 그녀의 천품이자 기질이었다. 그렇다고 권력과 자본의 구애를 뿌리치고 진실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꿋꿋이 사는 여자, <성>(카프카)의 아말리아와 같을 수도 없는 여자가 그녀였다. 운명보다 빠른 걸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운명보다 느리게 살 줄 알았던 여자, 바로 그녀가 루 살로메(1861~1937)였던 것이다.
운명보다 빠른 걸음으로 운명보다 느리게 사는 방식은 물론 ‘놀이’이며, 그녀는 놀이의 명수였다. 꼭 그녀만이 아니라, ‘총명하고 매력적이지만 남자들의 세상과 그 논리에 직수굿하게 응종하기 싫은 여자’는 으레 놀이에 능하게 된다. 그리고 호이징하의 놀이론과 달리 매력적인 약자에게 놀이는 종종 생존의 문제다: 그것은 다만 한가하고 무익한 형식성의 유희가 아닌 것이다.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1958)에는 놀이가 ‘가면을 쓰고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임의의 행위’로 정의되는데, 기이하게도 이것은 루 살로메가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리고, 이 현기증의 놀이는 3(삼각형)의 구조, 그 긴장의 아이러니 속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신과 조국과 남자의 그림자 속에 묻히기를 거부한 그녀는 가면을 쓰고 남자들로 하여금 현기증의 쾌락에 도취하게 만든다. 그것이 곧 생존이 된 아이러니인 것이다. 방년 17세였던 그녀는 목사 H. 길로트의 지식을 왕성하게 소화하지만, 이 유부남의 혼인 제의에 실망하고 스위스로 도피한다. 짐멜이 분석한 ‘연애유희’라는 개념처럼, 연애는 유희이니, 이 목사처럼 설맞게 혼인을 바라는 것은 반칙! 마찬가지로, 혼인이라는 상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 연애라는 아이러니.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그녀를 처음 본 니체가 건넸다는 유명한 인삿말이다. 역시 심오하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니체 특유의 화법이다. 호사가들은 니체와 루 살로메를 엮어 공상의 애드벌룬을 띄우기 좋아하지만, 둘 사이의 만남과 사귐은 실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통속, 통속, 그저 보아주기에도 눈이 시린 통속일 뿐이다. 파울 레가 그녀에게 니체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부탁했을 만큼 그녀 앞의 니체는 조급했고 들떴으며 상상할 수 없이 비철학적이었다. 38세의 니체는 변변한 데이트조차 없이 21살의 그녀에게 청혼함으로써 전래의 남성주의적 반칙을 반복한다. 그러나, 아뿔싸! 21살의 그녀가 실로 사랑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니체의 손’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아이러니였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의 섬세하고 하아얀 손을 좋아하고 신뢰했던 하이데거의 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흔에 가까운 이 천재 철학자는 혼인이라는 상식으로 얼뜨기처럼 무장한 채 그녀의 아이러니와 불구적으로 대치한다. 물론 통속적으로 상처받은 남자의 반응 역시 통속적이니, 니체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중상모략에 턱없이 호응하며 루 살로메를 ‘성불능자’로 매도하는 데에 이르고 만다.
그녀는 26세 되던 1887년 안드레아스와 혼인하지만, 얼마 후 둘 사이의 계약을 통해 이혼을 제외한 모든 행동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3(그녀, 남편, 자유)이며, 3이기에 가능해진 아이러니의 삶, 그 긴장이다.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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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출처 : 한겨레문화일반
참고 : 김영민 공부론에 대한 블로그
참고 : 김영민 공부론에 대한 블로그
생각의 좌표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 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정리된 것이든 아니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는 우리 생각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한국사회구성원인 나의 생각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물신 지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처럼 비교라는 말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와 내일의 관계를 견준다는 뜻은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남과 가진 것으로 견준다는 뜻만 남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 책머리에 중에서)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 pp.15~16)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 pp.28~29)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 pp.68~69)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 pp.72~73)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잘못 사용하는 줄 아는 사람들조차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 쓰고 있을 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다름=틀림’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 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 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다름의 관계를 ‘옳고/그름’, ‘우/열’의 관계로, 나아가 ‘선/악’, ‘정상/비정상’의 관계로까지 증폭시킨다. 소수자와 약자는 소수자와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 억압, 배제당하고, 인권 침해의 대상이 된다. 군사문화가 상징하는 힘의 논리와 결합하여 ‘다름=틀림’의 등식은 더욱 강력하게 관철된다. 집단에 기댄 이기주의자들이 양산되는 한편, 자기성숙의 모색을 위한 긴장을 다수, 강자 지향의 패거리주의의 품속에서 이완시킴으로써 사회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지 않도록 작용한다. ‘나는 옳다’를 전제로 한 ‘다름=틀림’의 등식은 타자만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아를 성찰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 pp.131~132)
나눔은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말은 분명 같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나눔이 독차지의 반대말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과 대칭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들도 ‘나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나눔에는 무척 관대하지만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로 일관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눔이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풂의 의미를 가졌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데 있다.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갖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큰 폭의 분배를 제도화한 뒤 나눔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더욱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왜 그럴까?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으니 단 한 푼인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70퍼센트를 넘는 국민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50퍼센트 이상이 감세정책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은 수백만 원씩 소득세를 덜 내는데 비해 고작 5만원을 덜 내지만 그래도 덜 내기 때문에 동의한다.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pp.163~166)
그러나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 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의 과정을 거쳐 비인간적인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희생도 무릅쓰면서 어렵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나마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 p.203)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스스로 묻는 소수와 함께 한다는 저자, 홍세화
천리길도 첫 한 걸음으로 시작되고 그 첫걸음은 나만의 공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다짐 하나만으로 이 사회의 구성은 다르게 채워질 것이다. 살기 급급한 대한민국 사고터지면 수습하기 바쁜 나라, 이것이 선진국과의 차이점이 아닌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 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정리된 것이든 아니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는 우리 생각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한국사회구성원인 나의 생각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물신 지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처럼 비교라는 말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와 내일의 관계를 견준다는 뜻은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남과 가진 것으로 견준다는 뜻만 남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 책머리에 중에서)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 pp.15~16)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 pp.28~29)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 pp.68~69)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 pp.72~73)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잘못 사용하는 줄 아는 사람들조차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 쓰고 있을 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다름=틀림’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 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 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다름의 관계를 ‘옳고/그름’, ‘우/열’의 관계로, 나아가 ‘선/악’, ‘정상/비정상’의 관계로까지 증폭시킨다. 소수자와 약자는 소수자와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 억압, 배제당하고, 인권 침해의 대상이 된다. 군사문화가 상징하는 힘의 논리와 결합하여 ‘다름=틀림’의 등식은 더욱 강력하게 관철된다. 집단에 기댄 이기주의자들이 양산되는 한편, 자기성숙의 모색을 위한 긴장을 다수, 강자 지향의 패거리주의의 품속에서 이완시킴으로써 사회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지 않도록 작용한다. ‘나는 옳다’를 전제로 한 ‘다름=틀림’의 등식은 타자만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아를 성찰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 pp.131~132)
나눔은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말은 분명 같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나눔이 독차지의 반대말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과 대칭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들도 ‘나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나눔에는 무척 관대하지만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로 일관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눔이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풂의 의미를 가졌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데 있다.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갖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큰 폭의 분배를 제도화한 뒤 나눔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더욱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왜 그럴까?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으니 단 한 푼인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70퍼센트를 넘는 국민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50퍼센트 이상이 감세정책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은 수백만 원씩 소득세를 덜 내는데 비해 고작 5만원을 덜 내지만 그래도 덜 내기 때문에 동의한다.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pp.163~166)
그러나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 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의 과정을 거쳐 비인간적인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희생도 무릅쓰면서 어렵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나마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 p.203)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스스로 묻는 소수와 함께 한다는 저자, 홍세화
천리길도 첫 한 걸음으로 시작되고 그 첫걸음은 나만의 공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다짐 하나만으로 이 사회의 구성은 다르게 채워질 것이다. 살기 급급한 대한민국 사고터지면 수습하기 바쁜 나라, 이것이 선진국과의 차이점이 아닌가?!
홀로 판단하고 다르게 판단할지라도 생각의 좌표를 갖고 소통을 하는 것이 하나의 어울림을 이루기가 보다 쉬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좀 더 안정적으로 탄탄히 이루기 위해서는 말이다.
HOW TO LIVE (II)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어떻게 살 것인가?
11. 절도있게 살라.
낭만주의 시대 독자들은 특히 라 보에시에 대한 몽테뉴의 강렬한 감성에 사로잡혔다. 몽테뉴가 강렬한 감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 이야기는 라 보에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극으로 끝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왜 서로 사랑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몽테ㅠㄴ의 간단한 대답, "그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적 끌림의 초자연적인 신비를 나타내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몽테뉴는 신처럼 되려는 야심에 대하여 불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인간 이하로 전락하리라고 생각했다. 타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은 한계를 초월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평범한 능력마저 잃어버린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이 되려면 단순히 평범한(ordinary) 방식이 아닌 보통(ordinate)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ordinate'를 '질서 정연한, 정리된, 정돈된, 규칙적인, 보통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알맞게 사는 것, 사물의 가치를 바르게 평가하고 각 상황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알맞은 삶은 '우리의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걸작'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절대로 거창하지 않은 자질을 표현한 말이다. '몽테뉴에게 '범속함'이란 사물을 통찰하려고 애쓰지 않아서 생기는 아둔함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초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하여 생기는 아둔함을 뜻한다. 이는 자신도 남들과 똑같고 인간 조건을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거이다. 자신은 여느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한 루소에게서는 이런 자질을 찾아 볼 수 없다. 몽테뉴의 말을 들어 보자.
사람 구실을 잘 하는 것 만큼 아름답고 합당한 것이 없고, 이 삶을 자연스럽게 잘 사는 법만큼 얻기 어려운 지식도 없으며, 갖가지 병폐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경시하는 것이다.
12. 인간성을 지켜라.
츠바이크의 견해로는 몽테뉴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이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나타난다. 그의 가치를 알려면 벌거벗은 '나', 즉 단순한 자신의 실존 이외에는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전쟁, 권력, 전제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소중한 본질인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겪어본 사람만이 집단적 광기(herd insanity)의 시대에 내면적인 자아를 유지하는 데 용기와 정직, 투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안다.
13.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것을 해보라
나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면을 부지런히 살핀다. 누구나 자기 앞만 쳐다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내게는 나 자신에 관한 일 욍는 상관할 일이 없다. 나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 자신을 잘 살펴보고, 나 자신을 음미한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뒹군다."나는 시선을 다시 내면 쪽으로 접는다" "Je replie ma venue au dedans"
그는 "나는 어떤 것이든 통째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사물이 지닌 수백 가지 요소와 면모 중에서 나는 한 가지만 택한다. 때로는 그것을 겉만 핥아보고, 때로는 표면을 쓸어보고, 때로는 뼈까지 꼬집어 본다. 찔러볼 때도 있지만, 넓게 찌르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깊이까지 깊숙이 찔러본다. 내가 가장 자주 즐기는 것은 익숙지 않은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14. 세상을 보라.
15. 너무 잘하지는 마라.
촌스럽고 정직한 몽테뉴의 태도가 오히려 뛰어난 외교 수완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속임수로 상대방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몽테뉴는 촌스럽고 정직한 태도로 더 많이은 문이 열었다.
16.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
17.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18. 통제를 포기하라.
19.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라.
버지니아 출프가 말한 마음의 사슬은 학문의 전통은 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에 자기중심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사슬이다. 이 모든 사람이 '인간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질,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잘 이어 나가야 하는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보잘것없고 찬란하지 않은 내 삶에 대하여 쓰고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평범하고 사사로운 삶도 부유한 이들의 삶 못지않게 모든 도덕 철학과 밀접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부유한 이의 삶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삶, 그것이 평범하고도 사사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그는 늙어간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교훈을 얻었다. 연륜이 쌓인다고 지혜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늙은이에게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허영심과 결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늙으면 '어리석고 낡은 자존심에 빠지고, 따분한 수다나 떨고, 쉽게 발끈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고, 터무니없이 재산에 대해서 걱정하는 '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방향이 틀렸다. 나이 먹음의 가치는 그러한 결점을 수정하는 데 이씨 때문이다. 노인이 되면 젊은이들은 찾기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의 결점을 찾을 기회가 생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쇠퇴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도 한계가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이를 먹는다고 슬기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결국 일종의 지혜를 얻는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결점을 지닌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는 갖가지 역겨운 특성이 단단히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특성의 씨앗을 인간으로부터 제거한다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여건이 파괴될 것이다.
철학도 실생활에 적용할 때에는 '투박하고 애매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모든 일을 속속들이 밝힐 필요는 없다'. 자신의 천재성에 눈이 먼 타소처럼 산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온건하고 겸손하고, 다소 흐리멍덩하게 사는게 더 낫다.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이 해결해줄 것이다.
20.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사람이더라도 천국에 대한 환상, 상상적인 지구의 종말, 완벽주의자의 환상보다 훨씬 크다는 몽테뉴의 신념이 필요하다. '학살과 살인을 저질러 하늘과 자연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믿음'이지만, 몽테뉴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인생에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가 실제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물 양동이에 집어 넣으려고 들고 있는 강아지를 쳐다보거나 놀고 싶어하는 고양이를 쳐다볼 때, 그 강아지나 고양이도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여기에는 추상적인 신조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단지 두 개체가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최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몽테뉴가 '에세'말미에 인용한 호라티우스의 시
레토의 아들 아폴론 신이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건강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소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해주시고,
노년에는 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
음악을 벗 삼아 살게 하소서.
HOW TO LIVE (I)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어떻게 살 것인가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 28 ∼1592. 9. 13
어떻게 살 것인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살기 위해서’ 읽어라.” -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프랑스 작가 )
01.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p.035
02. 주의를 기울여라.
단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보다 비열하고 오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대 플리니우스
당신은 단 한 번의 사고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 에우리피데스
근심 없는 사람의 인생만큼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근심 없는 삶은 참으로 고통 없는 악이다. - 소포클레스
인생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인생이 시간을 재촉하며 흘러가고 있어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박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p.057.
꽉 움켜쥐지 않으면 인생이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꽉 움켜쥐더라도 인생은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급류는 늘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급류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물을 마시듯 인생을 재빨리 마셔야 한다." 인생을 꽉 움텨질 수 있는 비결은 매 순간 겪는 경험에 꾸밈없이 순수하게 경탄하는 것이고, 가장 좋은 방법은 몽테뉴처럼 모든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물체,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경관을 글로 묘사해 보면 평범한 사물이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환상적인 영역이 눈앞에 펼처진다.
03. 태어나라.
어렸을 때에는 일정한 수준까지 변화되기 쉽지만 타고난 기질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단련시킬 수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교육 받은 대로 하지 않으려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089
04.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몽테뉴가 일고여덟 살 쯤 되었을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is)"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의 작품 느리게 살기 운동-독일의 작가 수템 나돌니(Sten Nadolny)의 소설 "느림의 발견(Die Entdeckung der Langsamkeit)"
0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라 보에시의 시뿐만이 아니라 몽테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초월적인 신비로 묘사하거나 두 사람이 엄청난 사랑의 격랑에 빠져들었다고 표현한 구절도 있다. 그는 어떤 일에서나 절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라 보에시와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무너졌으며, 독립성에 대한 사랑도 무너져버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영혼은 완벽하게 서로 어우러지고 뒤섞여 두 사람이 결합한 이음새가 지워져서 다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책 여백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내게 강요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다.
06. 작은 요령을 부려라.
몽테뉴와 같은 사상 체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 학파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였다. 이 철학 체계를 통틀어 헬레니즘이라고 하다. 이 세학파의 목표는 똑같다.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하는 생활 방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는 대체로 행복, 기쁨 또는 인간적인 번영으로 번역된다. 이는 풍요롭고 즐거운 인생,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잘 사는 것을 뜻한다. 이 학파들은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지름길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아타락시아는 침착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옮길 수도 있고 평정을 뜻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갈 때에도 기뻐 날뛰지 않고 모든 일이 꼬일 때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냉점함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스토아학파의 또 다른 수련방법은 영겁의 시간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태어나 그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처럼 아테네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다. 나비들은 모두 똑같은 식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것이다. 구름은 늘 같은 속도록 머리 위를 지나갈 것이다. 나 자신도 다시 태어나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죽었다 다시 태어나기를 끝없이 반복할 것이다.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도 모든 어려움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 덧없는 것으로 보이게 해준다. 동시에 내가 과거에 한 일이 모두 되돌아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중요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떤 일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명상하면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주의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지만,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준다(아모르파티는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운명애라고 번역된다. 니체는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 스토아주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모든 일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인생이 평온할 것이다.
07. 의문을 품어라.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모른다는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다.
....
"과거부터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모두 진실이고 누군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지식에 비하면 이 세계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가.... 신비로운 것 중에서도 그 자신만큼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딛고 선 자리는 너무 휘청거리고 불안정해서 흔들거리고 미끄러질 것 같으며, 내 눈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뱃속이 비어 있을 때의 내 모습이 밥을 먹고 난 후의 내 모습과 전혀 딴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내 건강 상태가 내게 미소를 짓고 햇살이 밝은 아름다운 날에는 내가 멋진 친구가 되고, 발가락에 티눈이 생겨 괴로우면 나는 무례하고 불쾌하고 접근 할 수 없는 인간이되어 버린다.
....
우리와 우리의 판단,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것들은 모두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굴러다닌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물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판단하는 존재나 판단되는 존재가 모두 지속적으로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리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다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새로운 생활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물을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든다. 세상은 모든 관점을 고려해야하는 광활한 다차원의 지형으로 바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현명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0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0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라.
철학이 위대하고 희귀한 것들보다 더 유념해야 할, 작지만 끝없이 풍성하여 매우 효과적인 것 중에는 '호의(Wohlwollen)'가 있다. '호의'란 눈웃음, 악수, 그리고 거의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일반적으로 배어 있는 편안함 등 우호적인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교사와 관리는 누구나 자기 직무에 이 요소를 양념으로 집어 넣는다. 우리의 인류애를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행위, 그런 행위에서 발하는 빛줄기, 모든 것은 이런 행위 속에서 성장한다.... 좋은 성격, 친절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 이런 것들은 이른바 동정심, 자비심, 자기희생 등을 표현한 명언보다 문화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하였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에 관한 저서에서 이와 비슷한 본능을 설명했다. "울타리 밑에서 뼈다귀를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 나무와 가로등의 냄새,"등 개가 겪은 경험을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개들도 우리의 경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책을 한장 한장 지루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개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의식상태에는 공통적인 성질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환전히 빠져 있을 때 나타나는 '열의' 또는 '설렘'이 그것이다. 설렘은 관심의 대상이 서로 다르더라도 유사성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러한 유사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최악의 실수 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악의 실수이다.
10.'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다소 반항적이지만 개방적인 해답인 '습관의 잠에서 깨어나라'
어떻게 살 것인가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 28 ∼1592. 9. 13
어떻게 살 것인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살기 위해서’ 읽어라.” -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프랑스 작가 )
01.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p.035
02. 주의를 기울여라.
단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보다 비열하고 오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대 플리니우스
당신은 단 한 번의 사고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 에우리피데스
근심 없는 사람의 인생만큼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근심 없는 삶은 참으로 고통 없는 악이다. - 소포클레스
인생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인생이 시간을 재촉하며 흘러가고 있어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박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p.057.
꽉 움켜쥐지 않으면 인생이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꽉 움켜쥐더라도 인생은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급류는 늘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급류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물을 마시듯 인생을 재빨리 마셔야 한다." 인생을 꽉 움텨질 수 있는 비결은 매 순간 겪는 경험에 꾸밈없이 순수하게 경탄하는 것이고, 가장 좋은 방법은 몽테뉴처럼 모든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물체,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경관을 글로 묘사해 보면 평범한 사물이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환상적인 영역이 눈앞에 펼처진다.
03. 태어나라.
어렸을 때에는 일정한 수준까지 변화되기 쉽지만 타고난 기질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단련시킬 수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교육 받은 대로 하지 않으려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089
04.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몽테뉴가 일고여덟 살 쯤 되었을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is)"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의 작품 느리게 살기 운동-독일의 작가 수템 나돌니(Sten Nadolny)의 소설 "느림의 발견(Die Entdeckung der Langsamkeit)"
0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라 보에시의 시뿐만이 아니라 몽테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초월적인 신비로 묘사하거나 두 사람이 엄청난 사랑의 격랑에 빠져들었다고 표현한 구절도 있다. 그는 어떤 일에서나 절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라 보에시와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무너졌으며, 독립성에 대한 사랑도 무너져버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영혼은 완벽하게 서로 어우러지고 뒤섞여 두 사람이 결합한 이음새가 지워져서 다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책 여백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내게 강요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다.
06. 작은 요령을 부려라.
몽테뉴와 같은 사상 체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 학파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였다. 이 철학 체계를 통틀어 헬레니즘이라고 하다. 이 세학파의 목표는 똑같다.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하는 생활 방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는 대체로 행복, 기쁨 또는 인간적인 번영으로 번역된다. 이는 풍요롭고 즐거운 인생,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잘 사는 것을 뜻한다. 이 학파들은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지름길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아타락시아는 침착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옮길 수도 있고 평정을 뜻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갈 때에도 기뻐 날뛰지 않고 모든 일이 꼬일 때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냉점함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스토아학파의 또 다른 수련방법은 영겁의 시간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태어나 그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처럼 아테네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다. 나비들은 모두 똑같은 식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것이다. 구름은 늘 같은 속도록 머리 위를 지나갈 것이다. 나 자신도 다시 태어나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죽었다 다시 태어나기를 끝없이 반복할 것이다.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도 모든 어려움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 덧없는 것으로 보이게 해준다. 동시에 내가 과거에 한 일이 모두 되돌아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중요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떤 일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명상하면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주의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지만,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준다(아모르파티는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운명애라고 번역된다. 니체는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 스토아주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모든 일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인생이 평온할 것이다.
07. 의문을 품어라.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모른다는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다.
....
"과거부터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모두 진실이고 누군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지식에 비하면 이 세계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가.... 신비로운 것 중에서도 그 자신만큼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딛고 선 자리는 너무 휘청거리고 불안정해서 흔들거리고 미끄러질 것 같으며, 내 눈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뱃속이 비어 있을 때의 내 모습이 밥을 먹고 난 후의 내 모습과 전혀 딴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내 건강 상태가 내게 미소를 짓고 햇살이 밝은 아름다운 날에는 내가 멋진 친구가 되고, 발가락에 티눈이 생겨 괴로우면 나는 무례하고 불쾌하고 접근 할 수 없는 인간이되어 버린다.
....
우리와 우리의 판단,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것들은 모두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굴러다닌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물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판단하는 존재나 판단되는 존재가 모두 지속적으로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리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다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새로운 생활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물을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든다. 세상은 모든 관점을 고려해야하는 광활한 다차원의 지형으로 바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현명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0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0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라.
철학이 위대하고 희귀한 것들보다 더 유념해야 할, 작지만 끝없이 풍성하여 매우 효과적인 것 중에는 '호의(Wohlwollen)'가 있다. '호의'란 눈웃음, 악수, 그리고 거의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일반적으로 배어 있는 편안함 등 우호적인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교사와 관리는 누구나 자기 직무에 이 요소를 양념으로 집어 넣는다. 우리의 인류애를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행위, 그런 행위에서 발하는 빛줄기, 모든 것은 이런 행위 속에서 성장한다.... 좋은 성격, 친절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 이런 것들은 이른바 동정심, 자비심, 자기희생 등을 표현한 명언보다 문화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하였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에 관한 저서에서 이와 비슷한 본능을 설명했다. "울타리 밑에서 뼈다귀를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 나무와 가로등의 냄새,"등 개가 겪은 경험을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개들도 우리의 경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책을 한장 한장 지루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개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의식상태에는 공통적인 성질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환전히 빠져 있을 때 나타나는 '열의' 또는 '설렘'이 그것이다. 설렘은 관심의 대상이 서로 다르더라도 유사성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러한 유사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최악의 실수 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악의 실수이다.
10.'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다소 반항적이지만 개방적인 해답인 '습관의 잠에서 깨어나라'
제발 조용히 좀 해요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소통 불가능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치유 불가능한 마음과 건조한 일상의 풍경, 가장 가까워야 하지만 결콘 좁혀지지 않는 친숙한 사람들 사이의 거리, 소소하지만 쉽지 않은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을 그려낸 레이먼드 카버의 첫 소설집, 조만간 읽어봐야 겠다!!
소통 불가능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치유 불가능한 마음과 건조한 일상의 풍경, 가장 가까워야 하지만 결콘 좁혀지지 않는 친숙한 사람들 사이의 거리, 소소하지만 쉽지 않은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을 그려낸 레이먼드 카버의 첫 소설집, 조만간 읽어봐야 겠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레이먼드 카버
모든 건 변해. 어떻게 변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변하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 중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 게 뭘까? 사랑에서 우리는 초보자일 뿐인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 그 점은 의심치 않아. 나는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는 나를 사랑하지. 그리고 당신들 역시 서로 사랑하고. 지금 내가 얘기하는 종류의 사랑이 뭔지는 알 거야. 육체적인 사랑, 특별한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충동, 그리고 다른 어떤 존재, 상대의 본질에 대한 사랑 말이야. 세속적 사랑,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 대해 일상적으로 배려하는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가끔 내가 전처 역시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게 되면 헷갈리기도 해. 하지만 내가 사랑했었고, 그랬다는 걸 알고는 있어. 그래서 바로 그런 점에서 내가 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테리와 에드 문제 말이야."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하더니 얘기를 이었다.
"전처를 생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혐오해. 그래, 이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 사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 알고 싶어. 누군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애드라는 자가 있지. 그래 다시 애드 얘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 했고, 결국 자살했어."
멜은 얘기를 중단하고 술을 마셨다.
"당신은 열여덟 달을 함께했고 서로 사랑하고 있지. 얼굴에 씌어 있어요. 사랑으로 광채가 나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서로 만나기 전에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했어. 당신들은 우리처럼 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지. 그리고 그전에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을 수 있어. 테리와 나는 함께한 지 오년이 되었고, 결혼한 지 사 년이 되었지.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내 말이 틀렸나? 근거가 없나? 내 말이 틀렸다면 바로 잡아봐. 난 알고 싶어. 내 말은,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 보다도 먼저 인정하는 바일세."
"멜, 맙소사."
테리가 말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취해요, 여보? 취했어요?"
"여보, 난 그냥 얘기를 하려는 것 뿐이야. 괜찮냐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려면 취할 필요까진 없어. 내 말은, 우린 그냥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라는 거야, 그렇지 않아?" -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중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 게 뭘까? 사랑에서 우리는 초보자일 뿐인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 그 점은 의심치 않아. 나는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는 나를 사랑하지. 그리고 당신들 역시 서로 사랑하고. 지금 내가 얘기하는 종류의 사랑이 뭔지는 알 거야. 육체적인 사랑, 특별한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충동, 그리고 다른 어떤 존재, 상대의 본질에 대한 사랑 말이야. 세속적 사랑,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 대해 일상적으로 배려하는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가끔 내가 전처 역시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게 되면 헷갈리기도 해. 하지만 내가 사랑했었고, 그랬다는 걸 알고는 있어. 그래서 바로 그런 점에서 내가 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테리와 에드 문제 말이야."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하더니 얘기를 이었다.
"전처를 생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혐오해. 그래, 이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 사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 알고 싶어. 누군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애드라는 자가 있지. 그래 다시 애드 얘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 했고, 결국 자살했어."
멜은 얘기를 중단하고 술을 마셨다.
"당신은 열여덟 달을 함께했고 서로 사랑하고 있지. 얼굴에 씌어 있어요. 사랑으로 광채가 나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서로 만나기 전에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했어. 당신들은 우리처럼 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지. 그리고 그전에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을 수 있어. 테리와 나는 함께한 지 오년이 되었고, 결혼한 지 사 년이 되었지.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내 말이 틀렸나? 근거가 없나? 내 말이 틀렸다면 바로 잡아봐. 난 알고 싶어. 내 말은,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 보다도 먼저 인정하는 바일세."
"멜, 맙소사."
테리가 말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취해요, 여보? 취했어요?"
"여보, 난 그냥 얘기를 하려는 것 뿐이야. 괜찮냐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려면 취할 필요까진 없어. 내 말은, 우린 그냥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라는 거야, 그렇지 않아?" -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중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아보기
"놀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 케리 스미스 지음, 임소연 옮김
세상에 재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놀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고 싶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사는 법
세상에 재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마음 가는 대로 스케치북을 채워 보라!!

- 원하는 인생의 지도를 그려 보라!!
1. 당신은 어디에 사나요? 집이 어떤 모습인지 묘사해 보세요.
2. 당신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3. 친한 친구들은 누구인가요? 그 친구들과 잘 지내는 비결은 뭔가요?
4. 매일 정서적, 영적,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뭔가요?
5.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세요. 당신의 옷차림에서 어떤 점을 추측해 볼 수 있을까요?
6. 당신이 선택한 직업에 관해 설명해 보세요.
7. 근무 환경을 묘사해 보세요.
8. 누구와 함께 일하나요?
9.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객과 업무 관계를 묘사해 보세요.
10. 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뭔가요?
11. 돈은 얼마나 버나요?
12. 돈을 어디에 쓰나요?
13. 상이나 훈장을 받은 적이 있나요?
14. 동료들이 당신을 어덯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세요.
15.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16. 당신의 팬들은 당신과 당신의 일에 관해 뭐라고 하나요?
17. 당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 어떻게 기여하고 싶은가요?
18. 당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어떻게 이여하고 싶은가요?
19. 여가 시간은 어떻게 즐기나요?
놀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최악의 순간 나를 위로해 준 것
두렵거나 외롭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치료법은 바깥으로 나가서 하늘과 자연과 신과 함께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거야. 그래야 비로소 모든 게 자연스러워 보이고 신께서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행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느끼게 되거든. 이런 자연이 존재하는 한- 분명히 언제나 존재할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슬픔에 늘 위안이 될 거야. 난 자연이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 줄 거라고 굳게 믿어 (안네의 일기 중)

- 용기와 자신감을 되찾고 싶다면
May Sarton, Natalie Goldberg, Colette, Sue Bender, Anais Nin, Anne Frank, Anne Morrow Lindbergh, Opal whiteley, Maya Angelou <= 여성작가들전기와 일기에서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
1. 자연을 매우 사랑한다.
2. 자신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3.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지 않고 떠올린다.
4. 다른 예술가, 작가, 창작자들과 교류한다.
5. 작가 모임과 저녁 식사, 지지 그룹, 카페 모임, 편지 쓰기, 오후 차 모임 등을 통해 아이디어와 영감을 공유한다.
6. 고독을 필요로 하고 신뢰한다.
7.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산책, 여행, 새로운 기술 습득, 독서, 요리, 탐험 등을 통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8.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해서 자신감을 얻었다.
9. 마음을 챙기는 타고난 재능이 있고, 평범함 속에서 마법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
10. 좋은 것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느낀 일도, 연민을 느낀 일도 있다.

- 창의적인 여성들에게 배운 10가지
1. 많이 웃자. 진심으로 웃자. 고함치고, 정화하고, 긍정하고 깔깔거리자.
인생이나 나 자신에 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절대로!
2. 정기적으로 즐거운 일을 벌이자. 내겐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창의적인 파티를 계획하자. 새로운 것을 엮자. 새로운 요리법을 시도하자. 게임을 직접 만들자.
3. 노래하자! 목소리 걱정은 뒤로하고.
4. 얼마의 시간은 여자들하고만 보내자. 그들과의 신성한 유대를 확인하면서.
5. 추억을 물건보다 소중히 여기자. 사랑과 우정이 세상의 모든 돈보다 중요하다.
6. 저녁노을을 감상하자.
7. 매일 낮잠자자.
8. 생일을 축하하자.
9. 나만의 의식을 만들자. 의식은 인생, 지구, 타인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시켜 준다.
10. 아이들을 존중하자.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고 싶다면
- '와비사비'를 실천해 보라
간소하게 살면서 풍성하게 즐기기
와비사비わび・さび(侘・寂):속도를 늦추고 숨겨진 것들, 불완전한 것들과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는 불완전함의 예술 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본 전통의 개념,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관한 것 '덜한 것이 더한 것'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사는 법
-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1.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철학과 사명부터 적어보기, 하나는 '목표'- 이 업계에서 독자성을 찾겠다. 다른 하나는 '행동'
2. 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긍정의 힘, "그걸론 먹고 살기 힘들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3. 롤모델을 찾으세요.
그 일과 인생의 롤모델을 삼고 그들에게 연락해 보라.
4. 이미 되고 싶은 사람이 됐다고 상상하세요.
5. 시도했다가 쉽게 포기한 사람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하세요.
6. 우선순위를 정하세요.
일과 인생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력을 쌓으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정규직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을 버려라. 경제 경영 분야의 책들도 한번 살펴봐라.
7. 두려움을 없애려고 애쓰지 마세요.
두려움은 성공 후에도 찾아 오는 것, 두려움을 없애려고 애쓰기 보다는 잘 다르는 법을 배워라.
8. 칠전팔기 정신을 발휘하세요.
9. 지금 시작하세요.
주변상황은 결코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기다린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거창하게 시작하려고 하지 말고 현재 상황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이용해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라.
10.걱정은 흘려 보내세요.
재능이나 능력에 관해 걱정하지 말아라.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 아니다. 게다가 재능이나 능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발달하고 변하는 법이다.과정을 즐겨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동시에 흥미진진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봐 두렵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1. 연습 - 아기가 걸음마하듯 차근차근 연습하라. 자신을 믿기란 힘이 드는 것이다.
2. 훈련 - 자신을 무엇보다 우선시하겠다는 결심을 굳건히 지켜라
3. 약속 - 편한 길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4. 수용 -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내버려 두고, 상황을 예측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섣불리 짐작마라.

영감은 의도에 따르는 것이다 - 에밀리카
세상에 재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놀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고 싶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사는 법
세상에 재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마음 가는 대로 스케치북을 채워 보라!!
- 원하는 인생의 지도를 그려 보라!!
1. 당신은 어디에 사나요? 집이 어떤 모습인지 묘사해 보세요.
2. 당신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3. 친한 친구들은 누구인가요? 그 친구들과 잘 지내는 비결은 뭔가요?
4. 매일 정서적, 영적,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뭔가요?
5.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세요. 당신의 옷차림에서 어떤 점을 추측해 볼 수 있을까요?
6. 당신이 선택한 직업에 관해 설명해 보세요.
7. 근무 환경을 묘사해 보세요.
8. 누구와 함께 일하나요?
9.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객과 업무 관계를 묘사해 보세요.
10. 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뭔가요?
11. 돈은 얼마나 버나요?
12. 돈을 어디에 쓰나요?
13. 상이나 훈장을 받은 적이 있나요?
14. 동료들이 당신을 어덯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세요.
15.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16. 당신의 팬들은 당신과 당신의 일에 관해 뭐라고 하나요?
17. 당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 어떻게 기여하고 싶은가요?
18. 당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어떻게 이여하고 싶은가요?
19. 여가 시간은 어떻게 즐기나요?
놀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최악의 순간 나를 위로해 준 것
두렵거나 외롭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치료법은 바깥으로 나가서 하늘과 자연과 신과 함께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거야. 그래야 비로소 모든 게 자연스러워 보이고 신께서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행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느끼게 되거든. 이런 자연이 존재하는 한- 분명히 언제나 존재할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슬픔에 늘 위안이 될 거야. 난 자연이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 줄 거라고 굳게 믿어 (안네의 일기 중)
- 용기와 자신감을 되찾고 싶다면
May Sarton, Natalie Goldberg, Colette, Sue Bender, Anais Nin, Anne Frank, Anne Morrow Lindbergh, Opal whiteley, Maya Angelou <= 여성작가들전기와 일기에서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
1. 자연을 매우 사랑한다.
2. 자신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3.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지 않고 떠올린다.
4. 다른 예술가, 작가, 창작자들과 교류한다.
5. 작가 모임과 저녁 식사, 지지 그룹, 카페 모임, 편지 쓰기, 오후 차 모임 등을 통해 아이디어와 영감을 공유한다.
6. 고독을 필요로 하고 신뢰한다.
7.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산책, 여행, 새로운 기술 습득, 독서, 요리, 탐험 등을 통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8.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해서 자신감을 얻었다.
9. 마음을 챙기는 타고난 재능이 있고, 평범함 속에서 마법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
10. 좋은 것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느낀 일도, 연민을 느낀 일도 있다.
- 창의적인 여성들에게 배운 10가지
1. 많이 웃자. 진심으로 웃자. 고함치고, 정화하고, 긍정하고 깔깔거리자.
인생이나 나 자신에 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절대로!
2. 정기적으로 즐거운 일을 벌이자. 내겐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창의적인 파티를 계획하자. 새로운 것을 엮자. 새로운 요리법을 시도하자. 게임을 직접 만들자.
3. 노래하자! 목소리 걱정은 뒤로하고.
4. 얼마의 시간은 여자들하고만 보내자. 그들과의 신성한 유대를 확인하면서.
5. 추억을 물건보다 소중히 여기자. 사랑과 우정이 세상의 모든 돈보다 중요하다.
6. 저녁노을을 감상하자.
7. 매일 낮잠자자.
8. 생일을 축하하자.
9. 나만의 의식을 만들자. 의식은 인생, 지구, 타인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시켜 준다.
10. 아이들을 존중하자.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고 싶다면
- '와비사비'를 실천해 보라
간소하게 살면서 풍성하게 즐기기
와비사비わび・さび(侘・寂):속도를 늦추고 숨겨진 것들, 불완전한 것들과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는 불완전함의 예술 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본 전통의 개념,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관한 것 '덜한 것이 더한 것'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사는 법
-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1.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철학과 사명부터 적어보기, 하나는 '목표'- 이 업계에서 독자성을 찾겠다. 다른 하나는 '행동'
2. 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긍정의 힘, "그걸론 먹고 살기 힘들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3. 롤모델을 찾으세요.
그 일과 인생의 롤모델을 삼고 그들에게 연락해 보라.
4. 이미 되고 싶은 사람이 됐다고 상상하세요.
5. 시도했다가 쉽게 포기한 사람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하세요.
6. 우선순위를 정하세요.
일과 인생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력을 쌓으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정규직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을 버려라. 경제 경영 분야의 책들도 한번 살펴봐라.
7. 두려움을 없애려고 애쓰지 마세요.
두려움은 성공 후에도 찾아 오는 것, 두려움을 없애려고 애쓰기 보다는 잘 다르는 법을 배워라.
8. 칠전팔기 정신을 발휘하세요.
9. 지금 시작하세요.
주변상황은 결코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기다린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거창하게 시작하려고 하지 말고 현재 상황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이용해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라.
10.걱정은 흘려 보내세요.
재능이나 능력에 관해 걱정하지 말아라.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 아니다. 게다가 재능이나 능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발달하고 변하는 법이다.과정을 즐겨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 무척 힘들지만, 동시에 흥미진진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봐 두렵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1. 연습 - 아기가 걸음마하듯 차근차근 연습하라. 자신을 믿기란 힘이 드는 것이다.
2. 훈련 - 자신을 무엇보다 우선시하겠다는 결심을 굳건히 지켜라
3. 약속 - 편한 길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4. 수용 -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내버려 두고, 상황을 예측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섣불리 짐작마라.
영감은 의도에 따르는 것이다 - 에밀리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951.4.27 비트겐슈타인이 생애 마지막 글을 쓰다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철학자,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러나 회의(懷疑)와 분석 그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지성의 혼돈과 미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철학적 고투가 그의 삶이었다. 20세기의 전설적 철학자이자 철학적 전설로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멋진 삶을 살았노라 전해주시오." -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말
1951.4.27 비트겐슈타인이 생애 마지막 글을 쓰다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철학자,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러나 회의(懷疑)와 분석 그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지성의 혼돈과 미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철학적 고투가 그의 삶이었다. 20세기의 전설적 철학자이자 철학적 전설로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멋진 삶을 살았노라 전해주시오." -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말
이 들은 누구인가?
게오르그옐리네크 [ Jellinek Georg ]
1851~1911
독일의 공법학자. 19세기의 독일국가학을 집대성하고 현대공법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존재와 당위를 구별하는 신칸트주의의 방법이원론에 입각하여 국가학을 국가의 사회학과 국법학으로 나누고 체계를 전개하였다. 사회학적인 국가개념과 법학적인 국가개념을 구별하는 국가량면설 및 법의 효력의 근거를 사회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사실의 규범 그리고 법과 국가의 관계에 기초를 마련하는 국가의 자유구소설 등은 특히 유명하다.
저서 / 1900년 일반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 공권론(System der subjektiven öffentlichen Rechte)
한스켈젠 [ Kelsen Hans ]
1881~1957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빈대학에서 교직을 맡고 있었는데 나치스의 박해를 피하여 국외로 탈출. 미국의 켈리포니아대학교수. 신칸트주의의 방법이원론이나 홋썰의 논리주의 흐름을 흡수하고 순수법학을 수립하여 법질서의 규범론리적인 구조를 명확히 하고 법단계설을 제창하였다. 민주주의론․국제법이론․이데오르기비판 등에서도 예리한 분석능력을 발휘하고 세계의 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
1925년 일반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 데모그라시의 본질과 가치(Vom Wesen und Wert der Demok ratie)
구스타프 라트브루흐 [Gustav Lambert Radbruch, 1878.11.21~1949.11.23] 독일인
독일의 법철학자. 쾨니히스베르크대학·킬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를 지냈다.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가치상대주의). 사회민주당 내각의 사법장관으로서 형법 초안을 기초하였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철학 요강》이 있다.
저서《법철학 요강》(1914∼1950)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뤼베크 출생. 뮌헨 ·라이프치히 ·베를린의 각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903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 강사로서 형법 ·법철학을 강의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 ·킬대학의 교수를 거쳐 192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일생을 보냈다. 신(新)칸트주의의 입장에서 존재와 당위(當爲)를 구별하고, 궁극적 가치판단에 대하여서는 인식이 아니라 귀의(歸依)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으며,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사회민주당 내각의 사법장관으로서 형법 초안을 기초하였고, 히틀러 정권 때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강단에서 쫓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치상대주의를 수정하였는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으나, 자연법적 경향을 띠었을 뿐, 자연법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철학 요강 Gründzüge der Rechtsphilosophie》(1914∼1950)이 있다.
한스 벨첼 [Hans Welzel, 1904.3.25~1977.5.5]
독일의 형법학자·법철학자. 목적적 행위론의 주창자이다. 위법성에 관하여는 고의·과실과 같은 주관적 요소까지도 위법성의 요소로 보는 인적 위법관을 취한다. 철학적으로는 N.하르트만의 영향이 크며, 법사상사 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저서《형법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가치철학》(1935)
1940년 괴팅겐대학 교수, 1952년부터 본대학 교수를 지냈고, 1962∼1963년에 총장을 역임하였다. 목적적 행위론(目的的行爲論)의 주창자로서 형법학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위법성(違法性)에 관하여는, 행위를 의지(意志)에 의하여 야기된 외적 인과사상(外的因果事象)으로 파악, 행위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을 분리하여 전자를 책임, 후자를 위법성의 문제로 본 결과, 일반적으로 법익침해설(法益侵害說)을 취하는 데 대하여 벨첼은 행위를 주관과 객관이 통합된 목적추구로 규정, 고의(故意) ·과실(過失)과 같은 주관적 요소까지도 위법성 요소로 보는 인적 위법관(人的違法觀)을 취한다. 철학적으로는 N.하르트만의 영향이 크며, 법사상사(法思想史) 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주요 저서에는 《형법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가치철학》(1935) 《자연법과 실질적 정의(正義)》(1951) 《독일형법체계(獨逸刑法體系)》(제11판, 1969) 등이 있다.
출처 : doopedia 두산백과
1851~1911
독일의 공법학자. 19세기의 독일국가학을 집대성하고 현대공법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존재와 당위를 구별하는 신칸트주의의 방법이원론에 입각하여 국가학을 국가의 사회학과 국법학으로 나누고 체계를 전개하였다. 사회학적인 국가개념과 법학적인 국가개념을 구별하는 국가량면설 및 법의 효력의 근거를 사회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사실의 규범 그리고 법과 국가의 관계에 기초를 마련하는 국가의 자유구소설 등은 특히 유명하다.
저서 / 1900년 일반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 공권론(System der subjektiven öffentlichen Rechte)
한스켈젠 [ Kelsen Hans ]
1881~1957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빈대학에서 교직을 맡고 있었는데 나치스의 박해를 피하여 국외로 탈출. 미국의 켈리포니아대학교수. 신칸트주의의 방법이원론이나 홋썰의 논리주의 흐름을 흡수하고 순수법학을 수립하여 법질서의 규범론리적인 구조를 명확히 하고 법단계설을 제창하였다. 민주주의론․국제법이론․이데오르기비판 등에서도 예리한 분석능력을 발휘하고 세계의 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
1925년 일반국가학(Allgemeine Staatslehre),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 데모그라시의 본질과 가치(Vom Wesen und Wert der Demok ratie)
구스타프 라트브루흐 [Gustav Lambert Radbruch, 1878.11.21~1949.11.23] 독일인
독일의 법철학자. 쾨니히스베르크대학·킬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를 지냈다.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가치상대주의). 사회민주당 내각의 사법장관으로서 형법 초안을 기초하였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철학 요강》이 있다.
저서《법철학 요강》(1914∼1950)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뤼베크 출생. 뮌헨 ·라이프치히 ·베를린의 각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903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 강사로서 형법 ·법철학을 강의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 ·킬대학의 교수를 거쳐 192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일생을 보냈다. 신(新)칸트주의의 입장에서 존재와 당위(當爲)를 구별하고, 궁극적 가치판단에 대하여서는 인식이 아니라 귀의(歸依)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으며, 상이한 세계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사회민주당 내각의 사법장관으로서 형법 초안을 기초하였고, 히틀러 정권 때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강단에서 쫓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치상대주의를 수정하였는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으나, 자연법적 경향을 띠었을 뿐, 자연법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철학 요강 Gründzüge der Rechtsphilosophie》(1914∼1950)이 있다.
한스 벨첼 [Hans Welzel, 1904.3.25~1977.5.5]
독일의 형법학자·법철학자. 목적적 행위론의 주창자이다. 위법성에 관하여는 고의·과실과 같은 주관적 요소까지도 위법성의 요소로 보는 인적 위법관을 취한다. 철학적으로는 N.하르트만의 영향이 크며, 법사상사 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저서《형법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가치철학》(1935)
1940년 괴팅겐대학 교수, 1952년부터 본대학 교수를 지냈고, 1962∼1963년에 총장을 역임하였다. 목적적 행위론(目的的行爲論)의 주창자로서 형법학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위법성(違法性)에 관하여는, 행위를 의지(意志)에 의하여 야기된 외적 인과사상(外的因果事象)으로 파악, 행위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을 분리하여 전자를 책임, 후자를 위법성의 문제로 본 결과, 일반적으로 법익침해설(法益侵害說)을 취하는 데 대하여 벨첼은 행위를 주관과 객관이 통합된 목적추구로 규정, 고의(故意) ·과실(過失)과 같은 주관적 요소까지도 위법성 요소로 보는 인적 위법관(人的違法觀)을 취한다. 철학적으로는 N.하르트만의 영향이 크며, 법사상사(法思想史) 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주요 저서에는 《형법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가치철학》(1935) 《자연법과 실질적 정의(正義)》(1951) 《독일형법체계(獨逸刑法體系)》(제11판, 1969) 등이 있다.
출처 : doopedi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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