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라보예 지젝 강연회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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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이 한국에 왔다. 슬라보예 지젝.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6월 27일(수) 저녁 7시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지젝의 강연이 열렸다.
그는 또한 소위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데 소위 도식적인 공산화과정만을 바라보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관념적인 좌파를 예로 들면서 끊임없이 창조적인 고민을 통해 자본주의 근본의 변혁을 위한 생산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산주의는 문제의 이름이라고 표현하면서 현재 글로벌 자본주의로 인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우리의 몫이라며 문제해결을 넘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창조적 지식을 키워야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이다.
이러한 역설을 발전시켜 다른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코미디인데 젊은 여자가 남자친구와 저녁식사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파트에 들어와 커피 한 잔 하지 그래?” 남자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 그러나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문제될 것 없어 우리 집에는 커피가 없어.”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중부정만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커피 안 마셔” “우리 집에 커피 없어” 이것 이상의 에로틱한 초청이 있을까요? 직접적으로 우리가 예상한 바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커피는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농담으로 시간을 낭비할까요? 왜냐하면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직설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는 거짓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커피의 예가 적절합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말하지만 결국 크림 없는 커피를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축적 의미에 주목해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럽에서는 심장질환이 한국보다 많이 발생하는데 그 원인은 금융위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이 긴축조치를 더 많이 강요하면서 임금을 낮추고 보건서비스를 축소합니다. 우유 없는 커피를 마셔야한다고 지도층이 강요 한다 칩시다. 사실상은 크림 없는 커피를 마시라는 것이죠.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함축적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이것이 저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Totality)이라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총체성 등등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실재 변증법적 분석을 해보면 핵심은 특정 이벤트를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특정 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언급할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야하고 국내외적으로 살펴야합니다.
사람들은 애플사의 성공을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폭스콘 없는 애플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입니다만 중국 폭스콘 공장의 높은 사람이 타이페이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는 “백만 마리의 동물을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동물’은 폭스콘에서 일하는 자신들의 노동자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콩고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콩고공화국은 많은 자연자본과 광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아무런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국지적으로 전투가 일어나고 있고 광물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콩고를 자본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글로벌 자본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법치가 부재한 국가도 포함시켜야합니다. 콩고에는 아동전사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콩고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성공한 국가들만 포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중국이나 싱가폴, 북부유럽 뿐만 아니라 콩고와 같은 암흑의 세계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성장을 잘 하고 있지만 몇 년 전 한국의 대기업중 하나가 마다가스카르에 비옥한 토지를 사려고 했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 개발된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를 사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새로운 기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요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체제들의 실패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개념의 부산물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그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들과 대립과 끔찍한 파생물들도 역시나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카테고리가 있다면 실업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맑스를 통해 봤을 때 착취와도 연결된 것입니다. 오늘날 실업자들은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용이 가능하지 않는 사람들 영구적인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말리아, 콩고처럼 나라 전체가 실업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특정지역전체가 실업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업무와 시장으로부터 고립돼 있는 것이죠. 이미 애초에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이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수백만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교육을 받은 전공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도 실직자에 포함시켜야합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점차 실직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할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반(Anti)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미디어를 보십시오. 특정기업이 아동을 착취하고 다른 기업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특정은행은 투기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렇게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 많은 자본과 은행에 대한 보도가 끊임없이 나오지만 사람들을 탓할 수 는 없습니다. ‘자본가는 탐욕스럽다.’라는 해석에 저는 이제 실증이 납니다. 최근에 자본주의는 탐욕이라는 것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의적으로 반자본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를 탓하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 분석은 시스템자체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가들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체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만을 고민합니다. 제가 어릴 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글로벌 자본주의를 추구하게 됐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권리와 자유를 주창하게 됐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른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본주의체제가 아닌 체제는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제 친구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공상과학소설에서 우리는 손쉽게 세계종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친구가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복잡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도 또 다른 대안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일까요? 20세기 공산주의가 끔찍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체제를 고수하자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 책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전공학의 문제로 인해 생태학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문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좌파성향의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한다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의 예로 급속한 발전을 환경이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이 이러한 급속한 발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을 지역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선활동, 유기농식품에 대한 호감도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다소 시니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방세계에서는 유기농식품이 인기가 많습니다. 유기농사과를 유기농상점에서 구입을 합니다. 보통사과보다 볼품이 없는데 여러분은 더 비싼 돈을 주고 그 사과를 구입을 합니다. 정말로 그 상품이 환경을 위해 좋은 일을 했는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여러분이 그 사과를 삼으로써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환경파괴는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렴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유기농 사과를 구입을 했으니 나는 지구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선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에이전트가 여러분을 아프리카 아동과 결연을 맺어주고 여러분은 매달 20달러의 기부금을 냅니다. 1년 후에 그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받습니다. 이런 활동은 여러분을 매우 기분 좋게 합니다. 내가 돕는 아이의 얼굴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간편한 출구와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생활의 방식을 크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적인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오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실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현상을 발견했는데 13층이 없더군요. 정말로 13이라는 숫자가 두렵다면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누구를 속이려는 것입니까. 14층이 사실은 13층이라는 것을 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듯이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코펜하겐 외곽에 어떤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철학자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출입구에 어떤 악령을 쫓아내기 위한 부적이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왜 이런 미신을 걸어 놓았느냐는 질문에 “물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두는 이유는 믿지는 않아도 효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내가 믿지 않더라도 작동은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본주의)시스템을 보면 우리 매일 매일의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와 같은 미신이 존재합니다.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신념의 표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이 세계문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프렌즈’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입니다. 웃어야하는 순간에 웃음소리가 납니다. 한국도 비슷할 것입니다. 퇴근 후 피로한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켜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 대신에 웃음을 웃어줍니다. 나 같은 경우 마치 내가 웃은 듯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애국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우리나라를 놀리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나는 ‘우리 아들 때문이다.’ 이런 식의 핑계를 댈 것입니다. 유럽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서도 선물을 삽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산타클로스를 믿느냐고 물으면 “저도 바보가 아녜요.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믿는 척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결고리고 작동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구결과이기도 한데요. 화장지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문을 믿는 몇몇의 사람들이 화장지를 사재기 하게 되면서 정말로 화장지의 공급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화장지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런 소문 때문에 실재로 화장지 공급부족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종의 독설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수론자들은 “우리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도입했다. 사람들은 희생을 모른다.”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인칭으로서는 믿지 않지만 우리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했을 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념이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과학자들이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원시사회를 발견하게 돼 그들과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 원시부족은 “우리의 토템이 독수리다.”라는 식으로 설명했더니 과학자들은 ‘새를 가지고 징표를 삼다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럽인이 이 부족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정말로 인류의 근원이 조류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진짜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삼촌이 그런 말을 했어요.”라는 식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누구든지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인류학자와 탐험단이 기니아에 있는 부족에 방문했습니다. 그 부족은 ‘죽음의 춤’을 추는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부족을 만나 춤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그 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인류학자는 만족스러워하며 원시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 춤은 죽음에 대한 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또 다른 탐험단이 그 부족을 만나 예전에 만났던 인류학자와의 만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두 번째 탐험단은 그 부족의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갔기 때문에 좀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그 부족은 첫 번째 탐험단은 자신들에게 뭔가를 요구를 했고 우리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탐험단이 부족으로부터 죽음의 춤을 보여주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해서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춤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탐험단이 죽음의 춤을 원했기 때문에 그 부족은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합니다. 퍼스트 러너라는 에스키모에 대한 환상을 담은영화가 있습니다. 두 개의 에스키모 부족이 서로를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에스키모 출신의 한 저자가 그 신화를 바꿔서 결론을 두 부족이 서로 화해를 하는 내용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저자에게 왜 그 신화를 상업화하는 내용으로 바꿨느냐고 물었더니 답은 “그렇지 않다. 내가 쓴 책은 우리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바로 유럽인들이 고유성에 집착을 하고 오리지날에 집착하는 것이지 이렇게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의 약, 고유의 약을 파는 상점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뉴질랜드에는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뉴욕에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바꾼다고 합니다. 여기서 역설은 본래의, 고유의 전통의 진품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구조, 신념의 구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것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념과 연관된 것으로서 주식시장에서의 선물거래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입니다. 투자를 할 때 짐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2년 후에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까지도 미리 점쳐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와 연과된 것인데 객관적인 현실은 없고 우리가 믿는 것만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구체화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맑스의 상품화의 페티시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맑스의 마켓 페티시즘을 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신념을 행동에 옮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맑스는 굉장히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시장 안에서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변증법적으로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불교와 같은 신념이 아시아에서도 심지어 은행가, 자본가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성향이 동양적 불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의 취약성을 이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지향을 가지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여러 가지 신념이 충돌해서 붕괴할 수 도 있습니다. 취약성과 외관의 취약성 등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존재론이 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고 이런 가르침이 모던 혹은 포스트 모던주의, 심지어 글로벌 자본주의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도 합니다. 작은 차원에서의 생태학과 하나의 생태학으로서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캔과 신문을 재활용 잘 했는가, 안했는가.’라는 물음은 결국 미신적인 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의 근본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서 지구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은 깨닫고 계십니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미신적인 행위에 대한 예 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스포츠경기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큰 소리로 팀을 응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그 팀이 힘을 얻을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선수들은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도 스타벅스가 있습니다.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어떠한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스타벅스는 사회적으로 의식 있는 회사라는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실 때마다 2센트씩 소말리아 아동에게 전달되고 열대우리 보존에 사용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를 하면 죄책감을 해소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이런 식의 현상과 신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시스템은 붕괴직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징후를 지난 2,3년간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스템이 거의 극한점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가 점령시위의 배경에도 이러한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월가 시위는 인종주의나 전쟁에 관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시위들은 사람들의 통찰력을 이용해서 어떤 구조적인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좌파로서 우리는 솔직해져야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이 전통적인 좌파라면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5년 전까지 서구권에서는 자본주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맑스주의자들, 지식인들은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위기가 일어나면 바로 붕괴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붕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심지어 대재앙을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서구유럽과 미국에서 그리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좌파는 어디 있습니까? 어떤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좌파는 사람들을 하나로 조직해서 이와 같은 운동을 이끌어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나는 좌파의 대안에 대해서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획은 일반적인 계획,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 말입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붕괴가 진정한 붕괴인가 아니면 제한적인 붕괴로서 더 많은 공공지출이 필요하고 보건 분야를 개혁해서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본주의를 벗어나서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기위해 무엇인 필요한가라는 계획들 말입니다. 지역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개혁 등 이러한 것에 대한 현실적인 제안에 대한 좌파의 대안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급진적 좌파는 여전히 내시향적 기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기다릴 뿐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진정한 노동자 계급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고 진정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급진적 좌파들은 이와 같은 사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현실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생태학적인 대재앙, 전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지구적인 대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의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불가능한 꿈을 꾸는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서구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사람들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하가를 이야기 할 때 미디어에서 이상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궁극적인 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하드웨어가 불멸의 존재가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의사가 이야기 한 것인데 성기를 두 개로 분리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지요. 다른 행성으로의 여행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개인의 영역에서는 기술을 이용해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불멸의 존재도 될수 있고 인공의 장기도 교체할수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세계가 열린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변화라는 것을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면 테러와 전쟁이 발발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적합한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공간의 구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라는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살살투쟁하자.’는 해결책에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비관론자입니다. 우리는 핵의 위기 혹은 생태적인 위기가 후쿠시마보다도 훨씬 더 큰 힘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대처하는 일들을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전공학을 생각해 봅시다. 굉장히 놀라운 영역입니다. 유토피아적인 미래가 아니고 오늘날에도 기술이 발전합니다. 유전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우리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르파는 CIA가 후원하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섬뜩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신념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유전공학으로 뇌의 구조를 바꿔 한 사람의 신념을 바꾸는 프로그램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신봉자가 테러리스트가 됐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이 그러한 신념을 신봉하기까지 뇌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관찰한 후에 이데올로기적인 세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뇌는 반복적으로 주입을 시키는 것인 반면 다르파는 화학적인 수술요법을 통해 뇌에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적인 분투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의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고 ‘너의 뇌로 들어가서 직접 바꿔버리겠다.’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늘날에는 여러분의 뇌의 명령을 해독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처럼 여러분의 생각을 컴퓨터와 연결하면 생각을 인지해서 명령을 받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두운 미래를 여러분에게 예고하고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정체성을 위협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생각을 갖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협을 하더라도 제 사고 영역은 제 것이고 저만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영역이 무너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엄청난 도전이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데올로기는 거짓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거짓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학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종교에서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관용을 지지합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관용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관용이 다른 의미를 띄기도 하는데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때 그렇습니다. 금연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콜과 마약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권에서 금연을 옹호하는 좌파들이 마약은 허용하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금연에 대한 강력한 문화는 어떻게 형성이 된 것일까요? 서구권에서는 담배를 구매할 때 담배갑에 건강에 대한 경고문이 있습니다. ‘담배는 여러분들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몸을 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또 폐와 장기가 손상될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도 있습니다. 이 예시는 금욕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섹스도 즐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부일처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라 그러나 너무 푹빠지지는 말아라.’라는 이데올로기 같습니다. 007시리즈 중 ‘퀀텀오브 솔러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좀 좌파적입니다. 제임스 본드가 볼리비아의 정권을 어떤 기업으로부터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 영화중 유일하게 제임스본드와 본드걸 간의 정사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댄 브라운의 끔찍한 소설과 영화를 보셨습니까? 다비친 코드를 예로 들면 로버트 랜덤이라는 주인공과 예수님의 증손녀가 나오는데 이들 간에도 정사신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다는 얘기인데 이 책에서 즉 지구상에서 섹스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의 댄 브라운 소설과 영화를 보면 소설에서는 정사신이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베드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얽히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유럽에 보면 중매회사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중매결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영어권에서 ‘사랑에 빠지다’를 표현할 때 ‘퐁당 빠지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알렌 바디우와 저 역시 그것을 깨달았는데 점차적으로 중매회사들이 ’사랑에 퐁당 빠지다.‘라는 카피로 광고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고도 결혼에 성공하게 해주겠다.‘는 문구를 광고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과의 깊고 복잡한 관계를 하지 않고도 결혼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섹스라는 것은 더 이상 열정적인 다른 사람과의 교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불행하게 될 것 이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랑의 교감이라는 것이 이제는 진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자위행위와 같다는 인식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지하고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산업들이 많은 플라스틱 제품을 내놓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스팸메일을 통해 자위기구를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상대가 없어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개구리 왕자와 소녀가 뽀뽀를 해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녀가 개구리에게 뽀뽀를 하자 왕자가 돼버립니다. 왕자가 사람이 되고 나서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맥주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소녀를 만지자 소녀가 맥주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기술 발전과 함께 탈섹스 사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추행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추행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집착을 하다 보니 이성의 호감을 사려는 행동도 추행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추행에 대한 공격은 계약적인 섹스로 이어집니다. 미리 계획을 짜고 서로간의 합법적인 계획 하에 서로를 쾌락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나친 성적 헌신이라고 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고 신념의 구조라는 것도 자본주의와 관련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믿지 않더라도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소비와 생산, 교역 등 우리의 경제 핵심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해야 되고 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특정한 교착상태에 근접해 있고 과거의 전통에 의존해서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자본주의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결합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큼 구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진입하고 있고 종전의 방식으로는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즐겨 했습니다. ‘상황이 침울할지라도 터널 끝에는 항상 희망의 빛이 있다.’ 터널 끝에 빛이 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한다면 나는 ‘다가오는 빛은 또 다른 기차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시니컬한 유모이죠. 저 역시도 명확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이름입니다. 우리 지구의 문제, 유전공학의 문제, 지적재산권에 대한 문제 등에 직면해 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전문가는 문제해결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지식인은 전문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를 하나의 법칙을 규명하고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대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큰 위기를 모면하는 시스템에 많은 도전을 가함으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창출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론 공부만 하는데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라는 논리는 조작입니다. 사고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 상황은 절박하겠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합니다.
출처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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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라는 것은 문제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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