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시인 헤르만 헤세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연의 매력이 마음에 들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들판을 마구 짓밟고, 마침내는 꽃과 가지를 꺾는다. 그러고는 금세 그것들을 내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와 시들 때까지 방치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 되면 그런 애정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선량한 마음에 스스로 감동하는 것이다.
<페터 카멘친트> 중에서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정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상상력을 좇아 살아 가는 자연의 일부분을 만들어 내는 정원사의 일은 시인의 일과도 비슷한 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정원사는 시인이 언어를 사용해서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한다. 즉 시인은 읽는 사람에게 새롭고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또 언어가 사물의 본 모습을 오나전히 드러내도록, 즉 언어가 생명을 갖도록 단어를 서로 조합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 온 것이 실현되자. 늘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방랑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의 본성은 미래에 다가올 변화를 예고 한다.
나는 이제 내 정원 안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를 보며 마음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에 대한 동경을 읽어 보린 것은 아니다.
1908년 바젤로 부친 편지에서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헤세는 강압에 대항하여 193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집필한 소설<유리알 유희>에서 자신이 생각해 온 또 다른 대안적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교리적인 방식으로, 여러 분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치적으로 양극화한 사회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 대립을 극복하는 하나의 교육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헤세는 관련된 사람들, 즉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압제"의 희생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했으며, 수백여 명의 이주자들과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대단한 행동력을 발휘해서 동참하고 지원했다.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으며, 자금을 지원하거나 조언을 하는 등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진영으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 보내 온 수천 통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면서 계몽하는 일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자원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보증을 서주거나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자를 주선해 주는 일 따위도 기꺼이 했다. 집단적이고 파국적인 권력에 대항해서 헤세는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능력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썼다.
<유리알 유희>라는 작품은 서기 2400년 이라는 미래의 한 시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돌이켜 바라보도록 구상한 미래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25세기에서 바라보는 20세기란 살벌한 기계화 시대로 회상된다. 헤세는 인간의 정신과 언어가 진실성을 상실한 이 시대에,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을 통해서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두 원칙의 투쟁을 승화시켜 하나의 협화음으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