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등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길이 없었다
분명 길이 있었는데
뛰고 뛰던 길이 있었는데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
어둠만이 들끓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만 저벅거리는
불 꺼진 어둠의 상가)

그 십여 년 고요히 끝나가고 있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뛰고 뛰던 길이 이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길을 묻다 지쳐서
길 위에서 잠든다

누구나 별 아래서 잠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일깨우면서

그리하여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별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하늘 너머

하늘 너머, 너머

하늘 너머
그 너머

역사라는 무겁고 후덥지근한
공간성을 떨쳐버리고
초시간적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수억의 추억의 시간은
그토록 짧다

하늘 너머
그 너머

다른 세상

한 육체였었으나
이미 한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없이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하염없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서
(아, 나는 너무 오래 잤을까)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다른 것들은 어디에서 오나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이미 있었으나, 없었으나, 다시 있는 
만지고 또 만져본 세상, 그러나
다시 있는, 언제나 천억 년 다시 있을,
바다빛 하늘빛처럼 푸르른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