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고가로 팔리는 너무도 우둔한 이 낙관주의. 그것은 전쟁과 비참함, 죽음과 고통을 그저 사람들의 어리석은 환상으로 치부한다. 그러면서 어떤 근심이나 문제 따위는 알려고 들지 않는다. 이 지나치게 거대한 미국식 모형을 본떠 키워진 낙관주의로 인해 정신은 자극받고 과장되고 억눌린다. 그리하여 한쪽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또한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적대감을 갖고서 분홍빛을 띤 어린아이의 세계를 거부하려고 한다. 이런 유의 사고는 시류를 따르는 철학자들의 저서나 잡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이웃인 두 그루의 나무. 경이로울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목련나무와 놀랍게도 비물질화되고 순수한 정신으로 남은 난쟁이 분재 사이에 앉아, 나는 그 두개의 대립물이 벌이는 유희를 관찰하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더운 날씨에 약간 졸기도 한다. 담배를 조금 피우면서 저녁이 되어 서늘해진 공기가 숲으로 부터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처에서, 내가 행동하고 읽고 생각하는 것 안에서, 오늘날의 세계가 겪는 것과 똑같은 분열이 내게도 부딛쳐 온다. 매일같이 몇 통의 편지를 받는다. 모르는 사람들한테서 온 편지들도 많다. 대개는 좋은 의도와 좋은 마음으로 쓴 것들이다. 나에게 동의하는 내용도 있고, 이따금 불평하는 내용도 있다. 모두가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하나같이 거칠고 닦이지 않은 낙관주의다. 그들은 비관주의 자인 나를 마음껏 질책하거나 비웃거나 서글프게 여기곤 한다. 때로 그들은, 내가 깊은 궁핍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현실을 과장하고 환상적으로 볼 권리를 주기도 한다.
물론 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자로서, 둘다 권리를 갖고 있다. 다만 나는 전자를 좀더 위험하다고 간주한다....
그 두 그루의 대립한 채 서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사물들처럼 정작 대립 자체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 둘 다 자기 자신과 자기가 지닌 권리를 확신하고 있으며, 둘 다 강인하고 질기다. 목련나무는 수액이 끈끈하게 넘쳐 오르며 그 풍성한 꽃잎들은 후텁지근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난쟁이 분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더욱 깊이 침잠한다.[1928년]
정원에서 띄우는 작은 편지들
헨네트 남작 부인에게
이 세계는 암울해 보입니다. 그래도 역시 봄은 오고, 어느 꽃이나 다 영원하고 쾌활한 웃음을 보여 줍니다.[1942. 3월]
크루트 비드발트에게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세계는 자주 시끄러움과 불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과 수목은 변함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날인가 지상이 완전히 콘크리트 상자들로 덮여 버린다 할지라도, 구름들의 유희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술의 도움을 빌려, 여기저기에 신성한 곳으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1949.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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