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밀대 -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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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는 추억이 담긴 사물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작은 가리비 모양의 마들렌이 일깨운 추억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우울한 내일을 예상하며 음울한 하루를 보낸 지친 나는 마들렌 한 조각을 적신 차를 한 수저 입에 떠 넣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게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해 동작을 멈추었다." 보잘 것 없는 빵 조각이 기억과 상실에 관한 명작을 탄생시켰다. 의식을 깨우는 감각의 힘에 대한 프루스트의 성찰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아주 먼 과거에서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을 때, 인간은 죽고 사물은 부서져 산산조각난 후에도, 훨씬 연약하나 오래 견디고, 실체를 찾기 훨씬 힘들고, 훨씬 끈질기고, 훨씬 충실한, 냄새와 맛은 유일하게 오랜 시간 남겨진다. 마치 영혼처럼 다른 모든 폐허 가운데 홀로 기억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져지지 않는 작은 한 방울 정수 속에 흔들림 없이,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품는다.

기억을 깨우는 의미 있는 사물은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이는 단순한 시적 해석을 뛰어넘는, 사무리 지닌 진정한 치유능력의 증거이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D.W. 위니캇은 '중간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아이가 곰인형이나 담요한테 보이는 애착은 엄마에게 받는 사랑이나 안정감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니캇은 그런 중간대상에서 아이의 온유하고 다정한 인성을 발견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사물은 상징주의와 창조성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정신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간현상은 과도기로 끝나지 않는다. 과도기는 결국 과거가 되지만, 환자의 병이나 우울증, 또는 어린 시절의 박탈감에 대한 반작용이나 유사현상에서 과도기적 현상은 일부분을 차지한다...." 중간대상은 기억과 감정과 아직 발굴되지 않은 창조성을 안고 있는 미지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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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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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이들과 함께 먹으려고 반달과자를 한 상자 샀다. 넉넉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아버지는 하루 지나 싸게 파는 과자만 사왔다. 그래서 과자는 늘 부서져 있거나 묵은 냄새가 났다. 흠이 없은 신선한 과자가 어떤 맛인지, 어린 시절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혀끝을 감도는 말끔하고 촉촉한 과자의 맛이 낯설고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퀴퀴한 냄새가 날 때까지 과자를 묵혔다. 며칠이 지나자 과자는 바닐라와 초콜릿이 딱딱하게 굳고 빵에는 물기가 사라진 '딱 알맞는' 상태가 되었고, 그는 드디어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맛을 다시 음미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사물이 지닌 놀라운 힘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자를 통해 잊었던 맛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경험을 통해 그는 '추억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잊고 있었던 맛과 향의 세계로 돌아갔고, 동시에 새로운 추억까지 얻었으며 어린 시절의 상징적 정수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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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말미에서 프루스트가 찾아낸 연관성은 위니캇의 견해와 상통한다. "슬픔에 뒤이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슬픔의 위력은 약해진다." 소설 속 비운의 주인공은 잃어버린 어머니를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하면서 자유를 얻는다. 고통이 새로운 생각과 심상으로 바뀌는 순간, B역시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기억을 깨우는 사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이다. 세대 간에 교감할 수 있게 해주고, 기억과 감정이 뿌리내리게 하며, 오래 전 잊혔던 애정을 다시금 돋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수잔 폴락(Susan Pollak)은 하버드 의과대학 심리학과의 임상교수이다.

중국 수석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돌은 전형적인 유형체이다. 그런 돌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어떻게 돌이 노래를 한다는 것일까? 자연의 끝과 문화의 시작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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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보고 있노라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3센티미터 크기의 축소 모형수석부터 지지대 없이도 10미터 가까이 올라선 '산'에 가까운 놀라운 수석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형태와 굴곡, 윤곽, 깊이는 모든 방면에서 자기복제를 되풀이 한다. 나는 신비로운 축척의 세계에 빠져든다. 아주 작은 수석이 내 눈 앞에서 자라고, 자라서 산이 된다. 거대하고 극적이다. 풍경의 전체이며 세계의 모든 것이다. 다양한 크기와 방향으로 생겨난 흠과 거칠게 패인 표면 속은 무한한 세계이다. 그 내면에는 깊은 공간과 끊임없는 변화가 존재한다. 수석의 의미는 단순히 윤곽이 아니라 내면의 형태에서 찾아야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별을 바로보는 것과같이,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행위이다.

중국 수석은 오랜 예술과 종교의 역사를 지녔다. 송나라시대(960-1279)에 문화를 향유하던 지식인들은 수석을 사색의 도구로 높이 평가하며 원시의 자연을 실내로 옮겨왔다. 또한 수석으로 전통적인 중국 정원에 독특한 개성이 더해지면서, 정원은 녹색 자연보다는 웅덩이와 모퉁이와 굽이길이 있는 동굴 내부를 닮게 되었다. 수석은 시의 주제였고, 주로 바위와 산을 그리던 중국 화권의 소재가 되었다. 활실에서도 수석을 매우 아꼈다. 중국문학에서는 이 같은 숭배의 대상인 수석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는 논의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수석'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사실에서 연유했지만, 알고 보면 수석의 역사는 호수나 지하 동굴에서 수석을 채취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의 초기 도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인들이 수석을 고르고, 작업을 하고, 장식대에 올리게 된 이유는 그것이 신의 거처라고 믿었던 산을 연상시켰지 때문이다. 의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수석의 신비는 중국 예술과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수석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의미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석은 자연의 선물이며, 동시에 의미를 중심축으로하는 중국의 문화이다. 결국 수석을 보며 드는 감정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석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사물이다.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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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로젠블룸(Nancy Rosenblum)은 하버드대학교 정부학과 학과장이자 정치 및 정부 윤리학 조셉S 클락교수이다.

책은 먼 곳에서 찾아 온 벗입니다



[BOOK] 책은 먼 곳에서 찾아 온 벗입니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새해 특별기고

책은 벗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반가운 벗입니다. 배움과 벗에 관한 이야기는 『논어』의 첫 구절에도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學而時習之不亦說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수험공부로 맥질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독서는 결코 반가운 벗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헤어지고 싶은 불행한 만남일 뿐입니다. 밑줄 그어 암기해야 하는 독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못됩니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열고,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비약(飛躍)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를 집필한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필자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발 딛고 있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우리시대의 문맥(文脈)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험공부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마 교양을 위한 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교양독서 역시 참된 독서가 못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양독서는 대개 고전독서이기도 합니다. 고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필요합니다. 고전은 인류가 도달한 지적 탐구의 뛰어난 고지(高地)들이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과거와의 소통도 어렵고 동시대인들과의 소통도 어렵습니다. 돈키호테와 햄릿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언어와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성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2011년 새해를 축하하는 글과 서화(위쪽)를 중앙일보 독자들에게 보내왔다.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을 몸으로 겪어온 신 교수는 이번 글에서 책과 삶, 그리고 사회의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통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인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어떤 중세기사의 이야기가 아니며, 햄릿은 덴마크 왕자의 개인적인 비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탈 중세(脫中世)의 전개과정이나 인간 존재의 운명적 비극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교양이나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경우 자신을 확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것이 됩니다. 독서는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읽고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를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와 맺고 있는 사회역사적 관련성을 성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사철(文史哲)을 공부하는 까닭은 그것을 통하여 깊이 있는 세계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서화(詩書畵)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사철이 언어(言語), 개념(槪念), 논리(論理)로 인식하는 것임에 비하여 시서화는 이를테면 소리와 빛으로 소통하는 뛰어난 세계인식입니다. 문사철 방식에 비하여 시서화의 방식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는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는 이 시서화의 세계마저 영상서사(映像敍事)로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책과 종이 그리고 독서의 종말을 예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사철이든 시서화든 영상이든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든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핵심입니다. 그러한 성찰만이 우리의 삶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영상서사는 그것의 뛰어난 대상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성찰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문학서사(文學敍事)가 요구하는 독자의 자신의 고뇌와 성찰이 사라지고 독자로 하여금 복제와 카피라는 대단히 안이한 자리에 나앉게 함으로써 우리들을 또 한 번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의 장구한 지적 탐구를 통하여 키워온 그 치열한 성찰성에 주목하고 다시 한 번 독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책들이 반드시 당대의 최고의 지적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사의 전개과정이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모든 미래지향 역시 지금까지의 역사를 디딤돌로 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독서와 문학서사는 최근의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발 딛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 그 자체이며 무형의 문화유산입니다. 언어 개념 논리라는 쉽지 않은 인식 틀을 키워온 인류의 정신사는 그것이 비록 세계인식의 최고형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지적 탐구를 뒷받침해 온 탄탄한 초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의 핵심이 바로 성찰(省察)입니다. 성찰은 철학적 추상력(抽象力)과 문학적 상상력(想像力)을 양 날개로 하는 자유로운 비상(飛翔)이며 조감(鳥瞰)입니다. 이러한 비상과 조감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의 재구성이 바로 성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여정을 내려다보는 창공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성찰과 비상이라는 지적 여정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독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여정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더 좋은 책, 더 좋은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미 새의 체온과 바람과 물 그리고 수많은 밤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어느 날 아침 문득 빛나는 비상으로 날아오릅니다. 고뇌와 방황으로 얼룩진 역경의 어느 무심한 중도 막에 그 때까지 쌓아온 회한과 눈물이 어느 순간 빛나는 꽃으로 피어오릅니다. 독서도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고뇌와 성찰의 작은 공간인 한 언젠가는 빛나는 각성(覺醒)으로 꽃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독서는 만남입니다. 성문(城門) 바깥의 만남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는 자신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남인 한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바다를 향하여 달리는 잠들지 않는 시내와 같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사회적 각성으로 비약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을 깨트리고, 우리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드넓은 세계로 향하는 길섶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굳이 새해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동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일출은 도처에 있습니다. 반가운 만남과 성찰을 쌓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찬란한 일출은 있습니다. 새해의 빛나는 성취를 기원합니다.

사진=안성식 기자


◆신영복은 누구인가=한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로 꼽힌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후진국 개발론’ ‘경제원론’ 등을 강의하다 스물일곱살이던 68년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다.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88년 가석방되기까지 20년 간 수감 생활을 했다.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며, 한국 사회에 인문학 붐을 일으켰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001년), 『더불어숲』(2003), 『처음처럼』(2007) 등의 책을 냈다.

출처 :[중앙일보] 입력 2011.01.01 00:12 / 수정 2011.01.01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