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그 동안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 새롭게 작성한 글,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을 묶은 그야말로 잡문집이다.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의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한다면 그지없이 기쁜 일이다. 
정리된 것이든 아니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녹아 있는 우리 생각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한국사회구성원인 나의 생각에 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하나에서 만난다. 이 책에서 첫마디로 제기한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이 이 물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물신 지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처럼 비교라는 말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와 내일의 관계를 견준다는 뜻은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남과 가진 것으로 견준다는 뜻만 남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시금 “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 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 책머리에 중에서)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고집할 텐데 대체 바뀔 가능성이 없는 나의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고.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 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 pp.15~16)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하지만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길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 pp.28~29)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 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의 말로 전해진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논리로 밀릴 것 같으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함으로써 자리를 모면하는 사람들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21세기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는 키케로의 말을 아주 잘 따른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당신 몇 살이야?”라고 묻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라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 pp.68~69)


남을 설득해본 사람은 안다. 남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잘못이 있다. 첫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을 아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자 혹은 중립적 의식의 소유자인 양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잘못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 pp.72~73)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잘못 사용하는 줄 아는 사람들조차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 쓰고 있을 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다름=틀림’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 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 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다름의 관계를 ‘옳고/그름’, ‘우/열’의 관계로, 나아가 ‘선/악’, ‘정상/비정상’의 관계로까지 증폭시킨다. 소수자와 약자는 소수자와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 억압, 배제당하고, 인권 침해의 대상이 된다. 군사문화가 상징하는 힘의 논리와 결합하여 ‘다름=틀림’의 등식은 더욱 강력하게 관철된다. 집단에 기댄 이기주의자들이 양산되는 한편, 자기성숙의 모색을 위한 긴장을 다수, 강자 지향의 패거리주의의 품속에서 이완시킴으로써 사회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지 않도록 작용한다. ‘나는 옳다’를 전제로 한 ‘다름=틀림’의 등식은 타자만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아를 성찰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 pp.131~132)


나눔은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말은 분명 같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나눔이 독차지의 반대말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과 대칭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들도 ‘나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나눔에는 무척 관대하지만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로 일관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눔이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풂의 의미를 가졌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갖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데 있다.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갖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큰 폭의 분배를 제도화한 뒤 나눔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더욱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왜 그럴까?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으니 단 한 푼인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70퍼센트를 넘는 국민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50퍼센트 이상이 감세정책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은 수백만 원씩 소득세를 덜 내는데 비해 고작 5만원을 덜 내지만 그래도 덜 내기 때문에 동의한다.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pp.163~166)


그러나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 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의 과정을 거쳐 비인간적인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희생도 무릅쓰면서 어렵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나마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 p.203)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스스로 묻는 소수와 함께 한다는 저자, 홍세화
천리길도 첫 한 걸음으로 시작되고 그 첫걸음은 나만의 공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다짐 하나만으로 이 사회의 구성은 다르게 채워질 것이다. 살기 급급한 대한민국 사고터지면 수습하기 바쁜 나라, 이것이 선진국과의 차이점이 아닌가?!
홀로 판단하고 다르게 판단할지라도 생각의 좌표를 갖고 소통을 하는 것이 하나의 어울림을 이루기가 보다 쉬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좀 더 안정적으로 탄탄히 이루기 위해서는 말이다.

HOW TO LIVE (II)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어떻게 살 것인가?

11. 절도있게 살라.
낭만주의 시대 독자들은 특히 라 보에시에 대한 몽테뉴의 강렬한 감성에 사로잡혔다. 몽테뉴가 강렬한 감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 이야기는 라 보에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극으로 끝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왜 서로 사랑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몽테ㅠㄴ의 간단한 대답, "그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적 끌림의 초자연적인 신비를 나타내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몽테뉴는 신처럼 되려는 야심에 대하여 불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인간 이하로 전락하리라고 생각했다. 타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은 한계를 초월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평범한 능력마저 잃어버린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이 되려면 단순히 평범한(ordinary) 방식이 아닌 보통(ordinate)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ordinate'를 '질서 정연한, 정리된, 정돈된, 규칙적인, 보통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알맞게 사는 것, 사물의 가치를 바르게 평가하고 각 상황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알맞은 삶은 '우리의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걸작'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절대로 거창하지 않은 자질을 표현한 말이다. '몽테뉴에게 '범속함'이란 사물을 통찰하려고 애쓰지 않아서 생기는 아둔함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초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하여 생기는 아둔함을 뜻한다. 이는 자신도 남들과 똑같고 인간 조건을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거이다. 자신은 여느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한 루소에게서는 이런 자질을 찾아 볼 수 없다. 몽테뉴의 말을 들어 보자.

사람 구실을 잘 하는 것 만큼 아름답고 합당한 것이 없고, 이 삶을 자연스럽게 잘 사는 법만큼 얻기 어려운 지식도 없으며, 갖가지 병폐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경시하는 것이다.

12. 인간성을 지켜라.
츠바이크의 견해로는 몽테뉴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이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나타난다. 그의 가치를 알려면 벌거벗은 '나', 즉 단순한 자신의 실존 이외에는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전쟁, 권력, 전제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소중한 본질인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겪어본 사람만이 집단적 광기(herd insanity)의 시대에 내면적인 자아를 유지하는 데 용기와 정직, 투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안다.

13.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것을 해보라
나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면을 부지런히 살핀다. 누구나 자기 앞만 쳐다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내게는 나 자신에 관한 일 욍는 상관할 일이 없다. 나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 자신을 잘 살펴보고, 나 자신을 음미한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뒹군다."나는 시선을 다시 내면 쪽으로 접는다" "Je replie ma venue au dedans"

그는 "나는 어떤 것이든 통째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사물이 지닌 수백 가지 요소와 면모 중에서 나는 한 가지만 택한다. 때로는 그것을 겉만 핥아보고, 때로는 표면을 쓸어보고, 때로는 뼈까지 꼬집어 본다. 찔러볼 때도 있지만, 넓게 찌르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깊이까지 깊숙이 찔러본다. 내가 가장 자주 즐기는 것은 익숙지 않은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14. 세상을 보라.


15. 너무 잘하지는 마라.
촌스럽고 정직한 몽테뉴의 태도가 오히려 뛰어난 외교 수완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속임수로 상대방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몽테뉴는 촌스럽고 정직한 태도로 더 많이은 문이 열었다.

16.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


17.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18. 통제를 포기하라.


19.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라.
버지니아 출프가 말한 마음의 사슬은 학문의 전통은 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에 자기중심적으로 사로잡혀 있지만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사슬이다. 이 모든 사람이 '인간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질,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잘 이어 나가야 하는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보잘것없고 찬란하지 않은 내 삶에 대하여 쓰고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평범하고 사사로운 삶도 부유한 이들의 삶 못지않게 모든 도덕 철학과 밀접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부유한 이의 삶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삶, 그것이 평범하고도 사사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그는 늙어간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교훈을 얻었다. 연륜이 쌓인다고 지혜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늙은이에게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허영심과 결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늙으면 '어리석고 낡은 자존심에 빠지고, 따분한 수다나 떨고, 쉽게 발끈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고, 터무니없이 재산에 대해서 걱정하는 '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방향이 틀렸다. 나이 먹음의 가치는 그러한 결점을 수정하는 데 이씨 때문이다. 노인이 되면 젊은이들은 찾기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의 결점을 찾을 기회가 생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쇠퇴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도 한계가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이를 먹는다고 슬기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결국 일종의 지혜를 얻는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결점을 지닌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는 갖가지 역겨운 특성이 단단히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특성의 씨앗을 인간으로부터 제거한다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여건이 파괴될 것이다.

철학도 실생활에 적용할 때에는 '투박하고 애매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모든 일을 속속들이 밝힐 필요는 없다'. 자신의 천재성에 눈이 먼 타소처럼 산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온건하고 겸손하고, 다소 흐리멍덩하게 사는게 더 낫다.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이 해결해줄 것이다.

20.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사람이더라도 천국에 대한 환상, 상상적인 지구의 종말, 완벽주의자의 환상보다 훨씬 크다는 몽테뉴의 신념이 필요하다. '학살과 살인을 저질러 하늘과 자연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믿음'이지만, 몽테뉴에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인생에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가 실제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물 양동이에 집어 넣으려고 들고 있는 강아지를 쳐다보거나 놀고 싶어하는 고양이를 쳐다볼 때, 그 강아지나 고양이도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여기에는 추상적인 신조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단지 두 개체가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최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몽테뉴가 '에세'말미에 인용한 호라티우스의 시
레토의 아들 아폴론 신이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건강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소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해주시고,
노년에는 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
음악을 벗 삼아 살게 하소서.




HOW TO LIVE (I)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어떻게 살 것인가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 28 ∼1592. 9. 13

 어떻게 살 것인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살기 위해서’ 읽어라.” -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프랑스 작가 )

01.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p.035

02. 주의를 기울여라.
단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보다 비열하고 오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대 플리니우스 

당신은 단 한 번의 사고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 에우리피데스 

근심 없는 사람의 인생만큼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근심 없는 삶은 참으로 고통 없는 악이다. - 소포클레스

인생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인생이 시간을 재촉하며 흘러가고 있어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박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p.057.

꽉 움켜쥐지 않으면 인생이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꽉 움켜쥐더라도 인생은 당신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급류는 늘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급류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물을 마시듯 인생을 재빨리 마셔야 한다." 인생을 꽉 움텨질 수 있는 비결은 매 순간 겪는 경험에 꾸밈없이 순수하게 경탄하는 것이고, 가장 좋은 방법은 몽테뉴처럼 모든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물체,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경관을 글로 묘사해 보면 평범한 사물이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환상적인 영역이 눈앞에 펼처진다.

03. 태어나라.
어렸을 때에는 일정한 수준까지 변화되기 쉽지만 타고난 기질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단련시킬 수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교육 받은 대로 하지 않으려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089

04.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몽테뉴가 일고여덟 살 쯤 되었을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is)"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의 작품 느리게 살기 운동-독일의 작가 수템 나돌니(Sten Nadolny)의 소설 "느림의 발견(Die Entdeckung der Langsamkeit)"

0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라 보에시의 시뿐만이 아니라 몽테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초월적인 신비로 묘사하거나 두 사람이 엄청난 사랑의 격랑에 빠져들었다고 표현한 구절도 있다. 그는 어떤 일에서나 절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라 보에시와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무너졌으며, 독립성에 대한 사랑도 무너져버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영혼은 완벽하게 서로 어우러지고 뒤섞여 두 사람이 결합한 이음새가 지워져서 다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책 여백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내게 강요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다.

06. 작은 요령을 부려라.
몽테뉴와 같은 사상 체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 학파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였다. 이 철학 체계를 통틀어 헬레니즘이라고 하다. 이 세학파의 목표는 똑같다.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하는 생활 방식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는 대체로 행복, 기쁨 또는 인간적인 번영으로 번역된다. 이는 풍요롭고 즐거운 인생,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잘 사는 것을 뜻한다. 이 학파들은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는 지름길은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아타락시아는 침착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옮길 수도 있고 평정을 뜻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나갈 때에도 기뻐 날뛰지 않고 모든 일이 꼬일 때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냉점함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스토아학파의 또 다른 수련방법은 영겁의 시간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태어나 그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처럼 아테네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다. 나비들은 모두 똑같은 식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것이다. 구름은 늘 같은 속도록 머리 위를 지나갈 것이다. 나 자신도 다시 태어나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죽었다 다시 태어나기를 끝없이 반복할 것이다.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도 모든 어려움이 잠깐 스치고 지나갈 덧없는 것으로 보이게 해준다. 동시에 내가 과거에 한 일이 모두 되돌아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중요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떤 일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명상하면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욱 주의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지만,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준다(아모르파티는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운명에 대한 사랑 또는 운명애라고 번역된다. 니체는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 스토아주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모든 일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인생이 평온할 것이다. 

07. 의문을 품어라.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모른다는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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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모두 진실이고 누군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지식에 비하면 이 세계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가.... 신비로운 것 중에서도 그 자신만큼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딛고 선 자리는 너무 휘청거리고 불안정해서 흔들거리고 미끄러질 것 같으며, 내 눈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뱃속이 비어 있을 때의 내 모습이 밥을 먹고 난 후의 내 모습과 전혀 딴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내 건강 상태가 내게 미소를 짓고 햇살이 밝은 아름다운 날에는 내가 멋진 친구가 되고, 발가락에 티눈이 생겨 괴로우면 나는 무례하고 불쾌하고 접근 할 수 없는 인간이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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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우리의 판단,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것들은 모두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굴러다닌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물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판단하는 존재나 판단되는 존재가 모두 지속적으로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리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다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새로운 생활 방식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물을 더욱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든다. 세상은 모든 관점을 고려해야하는 광활한 다차원의 지형으로 바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현명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0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0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라.
철학이 위대하고 희귀한 것들보다 더 유념해야 할, 작지만 끝없이 풍성하여 매우 효과적인 것 중에는 '호의(Wohlwollen)'가 있다. '호의'란 눈웃음, 악수, 그리고 거의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일반적으로 배어 있는 편안함 등 우호적인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교사와 관리는 누구나 자기 직무에 이 요소를 양념으로 집어 넣는다. 우리의 인류애를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행위, 그런 행위에서 발하는 빛줄기, 모든 것은 이런 행위 속에서 성장한다.... 좋은 성격, 친절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 이런 것들은 이른바 동정심, 자비심, 자기희생 등을 표현한 명언보다 문화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하였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에 관한 저서에서 이와 비슷한 본능을 설명했다. "울타리 밑에서 뼈다귀를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 나무와 가로등의 냄새,"등 개가 겪은 경험을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개들도 우리의 경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책을 한장 한장 지루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개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의식상태에는 공통적인 성질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환전히 빠져 있을 때 나타나는 '열의' 또는 '설렘'이 그것이다. 설렘은 관심의 대상이 서로 다르더라도 유사성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러한 유사성을 잊어버리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최악의 실수 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악의 실수이다.

10.'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다소 반항적이지만 개방적인 해답인 '습관의 잠에서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