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법 제정


1. 미국의 헌법 제정

1776년 7월 4일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13개 주의 대표들이 모여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존 애덤스(John Adams), 로저 셔먼(Roger Sherman), 로버트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다섯 사람이 기초한 ‘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선언하고, 이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의 건립을 천명하였다.

1781년 3월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제정(1977년 채택, 1981년 발효)하여, 13개 주정부가 연합한 형태로 국가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앙정부는 사법권을 보유하지 못하는 등 매우 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조직이었다.

1787년 새로운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국방·외교·통화 정책을 관장하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행정·입법·사법의 3권 분립 원칙을 수립하고, 연방의회를 2원화하여 상원은 각 주마다 동등하게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1791년 12월 15일에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수정헌법 10개조를 확정하였다. 1797년 헌법이 연방정부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특히 연방 정부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보장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공화주의자(Republicans)들의 주장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10개 조항의 수정안(Amendment)을 헌법에 추가하였다.

이후에도 미국 헌법은 몇 차례 수정이 있었는데, 1795년 2월 7일부터 1992년 5월 7일까지 수정헌법 제11조~제27조의 비준이 있었다. 헌법 조문 전체 내용은 미국 헌법 전문(全文) 및 수정 헌법 전문(全文)을 참조할 수 있다

2. 미국 연방대법원의 전개

건국 초기 연방법원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말에 따르면 “가장 힘이 약한 정부 부서”로 불릴 만큼, 사법부의 권위가 미약하였다.

그러나 1801년 존 마셜(John Marshall) 연방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일련의 판례를 통해 연방대법원의 법률심사(judicial review), 연방법 우위(federal supremacy)의 원칙 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연방대법원 스스로의 권한을 확대하고, 법치주의를 통해 사회 갈등을 봉합하고 경제 발전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사법부는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이자,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존 마셜 대법원장의 판례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베리 판결: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결에서 헌법상 명문 규정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위헌성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연방대법원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의 법률위헌심사권을 확립하였다.

· 마틴 판결: 1816년 마틴 대 헌터(Martin v. Hunter's Lessee) 판결에서 주(州)대법원의 최종판결이라도 연방법률이나 연방헌법상 문제가 있을 때는 연방대법원이 항소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 맥컬라크 판결: 1819년 맥컬라크 대 매리랜드(McCulloch v. Maryland) 판결에서 “필요하고도 적절한(necessary and proper)” 권리 조항에 의하여 연방법률이 주정부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첨예화된 노예 제도 폐지 논란에 연방대법원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1865년 남북전쟁 종식 이후 수정헌법 제13조를 통해 노예 제도의 폐지를 규정하였다. 이어 수정헌법 제14조 및 제15조를 통해 흑인들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와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는 스코트 대 스탠포드(Scott v. Sandford) 판결과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판결이 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은 스코트 판결을 통해 노예제도는 주정부의 고유 권한으로 연방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노예제도를 금지한 연방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또한 1896년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판결(Plessy v. Ferguson )을 통해 “분리되었으나 동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논리를 내세워 흑백 분리 교육을 합헌으로 결정하였다.

20세기 초반 산업화를 거치면서, 연방대법원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를 우선시하며, 노동자의 권익 및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와 관련된 판례로 센크 대 미국(Schenck v. United States) 판결이 있는데, 1919년 연방대법원은 센크 판결에서 “명백히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 존재하는 경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이후 보수주의로 치닫던 연방대법원은 1953년 얼 워런(Earl Warren)이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게 되면서 진보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판결을 통해 정부의 권력은 축소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다. 얼 워런 대법원장은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얼 워런은 연방대법원장 재직 이후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진보주의적 판결을 내렸는데, 그는 재직 기간 중 29개의 선판례를 번복하였다.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의 판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브라운 판결: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에서 흑백 분리 교육은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권 위배임을 선언하여, 1896년의 플레시 판례를 번복하였다.

· 맵 판결: 1961년 맵 대 오하이오(Mapp v. Ohio) 판결에서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증거의 재판 채택을 부인하였다.

· 미란다 판결: 1966년 미란다 대 애리조나(Miranda v. Arizona) 판결에서는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고지하지 않고 받은 자백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1980년대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Rehnquist)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얼 워런 대법원장의 진보주의적 헌법 해석에 제동이 걸리고, 보수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특히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헌법 해석에 있어 첫째 “어구의 자명한 의미(plain meaning approach)”에 의거하지만, 이로 불충분할 경우에는 “입법 의도(legislative intent)”를 규명해야 하며, 만약 이로써도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였을 경우, 사법부의 헌법 해석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사법 진보주의(judicial liberalism)’와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의 구분이 생기고,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법부가 ‘엄격한 위헌심사(strict scrutiny)’의 잣대로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와 ‘협의적 헌법해석(strict construction)’에 집착하는 ‘사법 제한주의(judicial restraint)’로 구분되었다.
출처 : 미국 개황, 2009, 외교통상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