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들면 절대 흥행하지 못할 것 같은 슬픈 단편

▶ 공간
파리의 전철역과 혼자 사는 여인의 아파트


▶ 등장인물
남자 : 대략 27세.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아주 어려서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여자 :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인
느낌으로는 30세 정도로 보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프랑스 여자



▷ Scene 1 지하철 플랫폼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남자.
지하철 한 대가 와서 멎으며 사람들을 풀어놓고 다시 떠난다.
한 맹인 여자가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남자 옆을 지나간다.
똑깍, 똑깍 - 지하 공간을 울려대는 맹인 여자의 지팡이 소리.

이때 저쪽에서 주인(사내)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던 큰 개 한마리가
맹인 여자의 지팡이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다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컹컹거리며 짖기 시작하는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사나워진다.
움질하며 걸음을 멈추는 여자, 다시 걷는다. 계속되는 지팡이 소리.
지팡이 소리에 더욱 흥분하는 개,
주인의 품을 헤치고 나와 맹인 여자에게 달려가 여자의 치마를 물어 뜯는다.
사정없이 찢기는 여자의 치마, 당황해하며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는 맹인 여자.
이때, 느릿느릿 걸어가 개를 말리는 껄렁껄렁한 개 주인.

이를 지켜보던 남자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맹인 여자의 아래를 가려준 뒤,
여자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운다.
여자는 아까부터 흐느껴 울고 있다.
대충 성의 없는 사과를 하는 개 주인,
그런 개 주인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다 개 주인의 멱살을 잡는 남자.
그러다 참겠다는 듯 손을 놓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자의 지팡이를 찾아 손에 쥐여주는 남자.

여자_ 고맙습니다. 제가 당황을 해서...
길을 모르겠어요. 매일 다니던 길인데...
(공간을 감지하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출구가 지금 제 정면에 있나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대꾸하지 못하는 남자.



▷ Scene 2 여자의 집

문이 열리며 맹인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맹인 여자의 허리에 감겨 있는 남자의 셔츠.
대충 자리를 찾아 앉고는 한숨을 몰아쉬는 여자와
멍청히 서서 방 안을 둘러보는 남자.

여자_ 왜 아까부터 아무말도 하질 않죠?
남자_.....
여자_ 참 이상한 일이군요. 차 한잔 드시겠어요?
남자_....
남자는 창가에 올려 놓은 화분을 보고 있다.
식물은 마를 대로 말라 비틀어 있다.

남자가 아무 대답도 없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여자,
남자를 잘못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여 한순간 얼굴에 두려움이 들어찬다.
그래도 감정을 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주전자를 찾고
주전자에 물을 채워 가스레인지를 켠다.
그녀의 동작이 점선처럼 느릿느릿, 더듬더듬 이어진다.
다시 찻잔을 챙겨 탁자에 앉는 여자.
그녀는 불안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고,
남자는 탁자 위에다 성냥개비 여러 개를 이어붙여 알파벳 글씨를 만들고 있다.

「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성냥개비 글씨를 읽게 하려고 남자가 탁자 위에 올려진 여자의 손을 잡자 깜짝놀라 뿌리치는 여자.
여자_이게 무슨 짓이예요?
가슴이 답답한 남자는 날랜 몸짓으로 찾잔을 집어든 다음,
찾잔을 부딪쳐 시끌운 소리를 내며 여자를 집중시키고, 진정시킨다.
이제 여자는 고요하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들어 탁자 위에다 뭐라고 쓰기시작하는 남자.

「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여자_ 미안해요. 전 글씨를 몰라요. 점자밖엔....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그녀가 힘없이, 하지만 평화롭게 미소 짓는다.)
아, 이 얘기조차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남자, 다시 여자의 손가락으로 뭐라고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남자의 움직임대로 따라가주는 여자의 손마디.
하지만 무슨 글씨인지 여자는 모른다.

여자_(한숨을 쉬며) 우린 참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군요.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자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차를 만드는 남자.
(관객은 남자의 익숙한 행동에서 혹시 그가 이집에 살고 있는 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어떤 익숙함을 발견하게 된다.)
탁자 위에 만들어진 두잔의 차.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
그 위로 삐거덕하며 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



The End

출처 : 이병률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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